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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한국 무용의 뿌리를 찾는다

 

그런데, 민속문화의 연구라고 해도 학자와 아티스트는 접근방식이 다르다. 그 중에도 무용가는 특별하다. 무용가는 연구 성과를 책이나 캔버스에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를 통해 재현한다.

무용가 김매자의 작업은 민족의 전통을 신체화 시키는 일, 혹은 전통적 신체를 회복시키는 일, 이라고 표현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토를 시작한 히지카타 타츠미가 일본적 풍경과 신체에의 회귀를 주창한 것과 통하는 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일본식 모던댄스의 영향을 받아 창조된 최승희의 "신무용" 과는 뿌리부터 구분되는 것이다. "한국 독자적인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는 시대에 이시이 바쿠는 굳이 최승희에게 한국 전통 춤을 배워 무대에 올리라고 했습니다. 그 자체는 고마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춤은 어디까지나 일본식 모던댄스에 한국적 요소가 들어간 것일 뿐입니다. 너무나 힘든, 시대적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김매자는 '신무용'도 아니고,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무용'

과도 다른 새로운 "한국무용"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일본인들은 한국무용이라 들으면, 일본무용과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 김매자의 한국무용을 본 일본인은 무척 놀란다. 그것은 매우 추상적이며 또한 한없이 자유롭기도 하다. 전통의 껍데기에서 벗어난 결과일까, 혹은 한국의 전통이 원래 자유를 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국의 전통 속에 원래 있는 것입니다. 즉흥성과 자유로움은 한국 무용의 핵심입니다"

김매자의 대답은 명쾌했다.

김매자가 찾아낸 새로운 한국무용은 그 자유분방함 때문인지 당초 "서양의 모던댄스와 한국전통의 결합"이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다. 김매자가 한국 전통 버선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무대에 올랐다는 소식에, 스승인 한영숙은 "미쳤냐"고 한탄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무용의 주류에서 보면 김매자의 시도는 "마치 전통의 파격"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1976년, 김매자는 제자 5명과 "창무회"를 설립한다.

"창무회의 목적은 한국무용의 현대화였습니다. 예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전통적 정신과 방법론을 가지고 현대를 표현하는 것. 컨템퍼러리 댄스로서의 한국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한국무용은 새로운 무대를 만났다.

 

 



 

 




 

"그 시대"

이런 한국무용의 현재까지의 흐름에 대해, 최근에는 일본의 다양한 장소에서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교토조형예술대학이 『경계를 넘어서는 전통 ― 한국무용의 현장에서 "김매자의 작업"』이라는 제목으로 대규모 행사를 진행하여, 4개의 무용 공연과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기획의 발안자는 야마다 세쓰코였다. "한국 무용의 선구자적 작업"과 만난 충격, 그 대단함을 다른 일본인과도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 시대에 저를 한국으로 초청했어요. 우선 그것부터가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심포지엄의 첫머리 인사에도 그랬지만, 야마다 세쓰코는 김매자와의 교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그 시대"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한국과 일본이 지금처럼 자유롭게 오가는 관계가 되기 전의 시대라는 의미이다.

야마다 세쓰코가 처음 한국을 방문한 1986년에, 아직 한국은 "민주화 이전"으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도 제한이 있었다. 연극 등에도 사전검열이 있었고, 내용에 따라서는 상연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본을 2개 준비했죠. 검열용 가짜 대본과 진짜 대본. 일단 허가를 받아놓고 대본을 바꿔 쓰고. 공연 중에는 우리도 긴장하고 관객도 긴장하고."

연극계 인사들과 얘기하다 보면 지금도 그런 옛날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엄격하게 제한된 것이 정부에 비판적인 것, 공산주의를 긍정적으로 다루는 것, 그리고 "일본 문화"였다.

이 연재 첫회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일본제국주의에서 해방된 한국에서는 "일본 문화의 잔재를 일소하고, 민족성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미션이었다. 국토에 배어 버린 일본을 씻어 내고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키우는 것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일분 문화 진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상당수 한국인들의 생각이었다.

 





일본 문화 개방 이전

 

그래서 1987년 민주화가 선포된 뒤에도, 일본 문화 개방에 대해서는 구체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일본문화의 단계적 개방이 정부방침으로 확인된 것은 10년 후인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었다. 일본 영화·연극 등 광범위한 일본 대중 문화가 실제로 개방된 것은 2000년,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를 목전에 두고서부터였다.

이때 일본 문화 개방과 그 후의 한류 열풍을 거쳐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파격적으로 좋아졌다. 정치적 문제는 있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해지자 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지금은 일본인이 무용이나 연극공연을 해도 특별한 이슈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1986년 야마다 세쓰코 이전에 한국에서 문화 활동을 한 일본인은 찾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야마다 세쓰코는 선구자적인 존재이고, 그것을 기획한 김매자 역시 선도자였다. 같은 해 아시아대회 공식기념행사로 무대에 올린 일본극단 <스콧>도 첫 공식공연으로 주목 받았지만, 창무 아시아 무용제 또한 해방 후 한일문화교류사의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야마다 세쓰코가 걱정한 것처럼 이 시기의 일본인 무용가 공연을 언짢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매자의 귀에도 물론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때부터 매년 일본인 무용가를 초청했고, 1993년에는 일본 부토 페스티벌이라는 일본만을 대상으로 하는 이벤트까지 개최하였다. "그 시대"에 왜 그렇게 까지 했는지? 김매자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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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韓国舞踊の根っこを探す

 

ところで、民俗文化の研究といっても、学者とアーティストはアプローチの方法が違う。なかでも舞踊家は特別だ。舞踊家は研究の成果を書物やキャンパスに表現するのではなく、自らの身体をもって再現のである。

舞踊家としてのキム・メジャの作業は、民族の伝統を身体化することだった。あるいは伝統的身体を回復するという言い方もできるかもしれない。それは日本的風景と身体への回帰を唱えた土方巽の「舞踏」とも通じるものがある。しかし、逆説的ながら日本式モダンダンスの影響下に創られた崔承喜の「新舞踊」とは、根っこの部分で区別される。

「韓国独自の文化が失われていく時代に、石井漠先生はあえて崔承喜先生に韓国の伝統を学ばせ、舞台に取り入れることを促しました。これは自体はありがたいことだと思っています。ただ、その舞踊はあくまでも日本式のモダンダンスの中に、韓国的な要素が入ったに過ぎません。とても厳しい時代の制約があったのです」

そうしてキム・メジャは崔承喜の「新舞踊」とも、文化財に指定された「伝統舞踊」とも違う、あらたな「韓国舞踊」を創りあげた。

日本人は韓国舞踊と聞いて、日本舞踊を同じようなイメージをもつかもしれない。しかし、そのつもりで実際の韓国舞踊を見た日本人はとてもびっくりする。それはあまりにも抽象的であり、かつ、限りなく自由でもある。伝統の殻を打ち破った結果なのか、あるいは韓国の伝統がもともと自由を内在するのなのか? キム・メジャの答えは明快だった。

 「それは韓国の伝統の中にもともとあるものです。即興性と自由さは韓国舞踊の真髄です」

キム・メジャらが創りあげた新たな韓国舞踊は、当初その自由奔放さゆえに「西洋のモダンダンスと韓国伝統舞踊の結合」という言い方もされた。キム・メジャが韓国伝統のポソン(足袋)を脱ぎ捨てて裸足で舞台に立ったのを知り、師であるハン・ヨンスクは「正気ではない」と嘆いたともいう。当時の韓国舞踊の主流からみれば、キム・メジャの試みは「あたかも伝統の破格」に見えたのだ。

1976年、キム・メジャは教え子5名と「創舞会」を設立する。

「創舞会の目的は韓国舞踊の現代化でした。古くから私達に伝わる伝統精神と方法論もって、現代を表現する。コンテンポラリーダンスとしての韓国舞踊です」

 こうして韓国舞踊は新しいステージを迎えた。



 

「あの時代」

 このような韓国舞踊の現在にいたる流れについて、最近は日本でも様々な場所で紹介されるようになった。2011年には京都造形芸術大学が『越境する伝統――韓国舞踊の場所から「金梅子」の仕事』というタイトルの大規模なイベントを行い、4つの舞踊公演とシンポジウムが行われた。企画の発案者は山田せつ子。「韓国舞踊の先駆的な仕事」と出会った衝撃、その素晴らしさを他の日本人とも共有したいという思いだった。

 「あの時代に私を韓国の招請してくれた。まずはそのことが、すごいことだと思うのですよ」

 このシンポジウムの冒頭の挨拶でもそうだったが、山田せつ子にキム・メジャとの交流について尋ねると、必ず「あの時代」の話から始まる。日本と韓国が今のよう自由に行き来できる関係になる以前の時代という意味だ。

山田せつ子が初めて韓国を訪れた1986年は、まだ韓国は「民主化以前」で言論や表現の自由にも制限があった。たとえば演劇なども事前検閲があり、内容によっては上演許可がおりなかった。

「芝居をする時もね、台本を2つ用意しておくんですよ。検閲用のニセ台本と本物の台本。許可が出た後で台本をすり替える。スリリングな時代でした。演ずる我々も観客も緊張していました」 今でも韓国の演劇関係者と話していると、そんな昔話がよく出てくる。中でも制限が特に厳しかったのが、時の政府に批判的なもの、共産主義を肯定的に扱うもの、そして「日本文化」だった。

この連載の1回目でもふれたが、日本の植民地支配から解放された韓国にとって、「日本文化の残滓を一掃する」することは、民族性を回復するうえでの、大切なミッションだった。国土に染み付いてしまった日本を洗い流し、独自の民族文化を育てていくこと。それが完成するまでは、ある程度の制限は仕方がないと、韓国人の多くが考えていた。


 




 

日本文化開放(2000年)以前

だから1987年に民主化宣言が出された後も、日本文化の開放に関しては、具体的な措置はとられなかった。日本文化の段階的開放が政府方針として確認されたのは10年後の1998年、金大中大統領の時代になってからである。そして、実際に映画・演劇などを含む広範囲の大衆文化が開放されたのは2000年、W杯の共同開催決定をうけてのことだった。

この日本文化開放とその後の韓流ブームを経て、日本と韓国の関係は破格によくなった。政治的な問題は今も深刻ではあるものの、人々の往来は活発になり、双方の文化に対する理解もすすんだ。今は韓国で日本人が舞踊や演劇の公演をしても、それ自体が大きなイッシュ―となることもない。

しかし、1986年の山田せつ子以前に、韓国で公演などの文化的活動をした日本人は数えるほどしかない。その意味で山田せつ子はまさにパイオニア的な存在であるし、それを企画したキム・メジャもまた先駆者だった。同じ年に、アジア大会の公式記念行事として行われた劇団スコットの演劇公演も初の公式公演として注目されたが、創舞アジア舞踊フェスティバルもまた、戦後の日韓文化交流史の出発点としても、大きな意味を持つのである。

一方で、山田せつ子が案じたように、この時期の日本人ダンサーの公演をよく思わない人もいた。キム・メジャの耳にはもちろんそうした声も届いていたはずだ。にもかかわらず、彼女はこの時から毎年のように日本人舞踊家を招聘し、さらに1993年には日本舞踏フェスティバルという日本限定のイベントまで開催してしまう。「あの時代」にどうして、そこまでしたのか。次回はその話をキム・メジャに聞くつもりだ。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