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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심청>을 보았다



5월 말경 김매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국립무용단과 같이 작업을 해서 <심청>을 무대에 올리는데 보러 와줬으면 좋겠어요."

<심청>은 판소리와 무용을 접목시킨 김매자의 대표작 중 하나다. 2001년 초연 이후 여러 차례 국내 외 무대에 올려졌다. 이번에는 그녀 자신이 춤추는 것이 아니라 국립무용단의 레퍼토리로 새롭게 탄생시켰다고 한다.

"김매자 선생님뿐 아니라 창무회 다른 선생님들도 매일 연습실에 가 계세요. 멋진 무대가 될 거예요." 이러한 관계자의 얘기에서도 김매자와 국립무용단 양측의 의욕이 느껴졌다.

그날 대극장은 약 1500명의 관객으로 가득 찼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판소리 <심청전>의 애절한 울림과 무용가들의 세련된 신체 표현은 환상적이었다. 커튼콜에 나타난 출연자들의 미소는 눈부셨고 이 작품을 본 누구라도 감탄을 자아낼 법한 무대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필자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걸렸는데, 그 이유를 이 원고를 쓰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김매자가 추는 <심청>을 보고 싶었다. 판소리와 함께 미친 듯이 춤추는 그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안무가 김매자도 훌륭하지만 작품이 좋을수록 본인의 무용을 그리워한다. 팬들은 그녀가 몇 살이 되어도 춤추는 그 몸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김매자의 고뇌

이야기를 다시 지난 호에 되돌려, 1990년대 초 김매자는 대학을 떠나 한 무용가로서 살아나갈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무용전용극장을 세우고 국제무용페스티벌을 개최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 화려한 출범이 무용가 김매자에게 예상 밖의 고뇌를 겪게 만들었다. 얼마 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김매자는 "창무예술원 창립 당시 나는 포스트극장에서 무용수로 후회 없이 춤을 추고자 하는 정열을 마음 깊이 새기며, 예술원 운영에 매진하는 고뇌의 10여 년을 보내고 나니 새로운 작품을 만들 여력이 전혀 없었습니다."(「무대예술」 2013년 봄호)라고 밝혔다.

이 심포지엄은 '월경하는 전통 ― 한국무용의 장소에서 <김매자의 작업>이란 주제로 2011년 2월 10일과 11일 양일간 일본 교토에서 열렸다. 야마다 세츠코가 기획했고 그녀가 소속한 교토조형예술대학 무대예술연구센터가 주최를 한 이 심포지엄에서는 김매자와 창무회에 의한 <살풀이>, <춤본 Ⅱ>, <춤 그 신명>, <빛>의 4작품이 상연되는 동시에 김매자 자신에 의한 '60년 내 춤'이라는 강연도 있었다.

그 강연의 기록은 교토조형예술대학 발행 「무대예술」에 게재되었고 리드부분에는 김매자가 "전통과 현대의 관계성과 어떻게 마주보고, 어떻게 그 무용예술을 발전시켰는지", "그것은 무대 예술의 미래를 생각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기술되어 있다.

물론 학술적으로는 그렇다고 하지만 다시금 그 강연기록을 읽어보면, 새삼 그녀의 무용가 인생이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외면이나 비판도 있었을 것이다. 많은 선구자들이 늘 그러하듯이 그녀 또한 '고립'이나 '고독'을 맡아야 했다.  


도와주던 사람들


예술가 중에는 고독을 자신의 거처로 삼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김매자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항상 사람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했다.

"김매자 선생님은 의로운 사람이에요. 친구를 무척 아끼고요. 오해를 받기 쉬운 면도 있지만 실은 너무 섬세해요."

야마다 세츠코의 시동생인 남상영의 말이다.

"제가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이 많은 친구들의 덕분이에요. 그중에서도 일본의 친구들은 제가 정말 어려운 때 도와주었어요. 야마다 세츠코 부부는 물론이지만 그 친구인 야기 추에이 와 노부코, 그리고 타카하시 이와오, 시무라 후쿠미, 카사이 아키라 등 일본 인지학협회의 사람들. 또 이와나미 홀의 다카노 에츠코 씨도 매우 소중한 친구였어요."

김매자는 첫 인터뷰 때부터 되풀이하고 이들의 이름을 올렸다. 1988년 김매자의 일본 최초 공연을 성사시킨 야기 추에이에 대해서는 다섯 번째 연재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번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필자는 타카하시 이와오와 시무라 후쿠미라는 두 사람과 김매자와의 유대가 이렇게 깊다는 것에 놀랐다.

타카하시 이와오는 슈타이너 연구의 일인자이고 일본 인지학협회의 창립자다. 시무라 후쿠미는 이주 유명한 수필가자 염색작가이며 1990년에는 인간문화재 지정도 받았다. 그녀도 인지학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원래 야마다 세츠코의 스승인 무용가 카사이 아키라를 통한 관계였지만, 어느덧 두 사람과 김매자는 매우 친한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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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沈清」を見た



 2016年5月の終わり、キム・メジャから連絡をもらった。

「国立舞踊団で『沈清』をやるので見にきてほしい」

『沈清』はパンソリと舞踊を融合させたキム・メジャの代表作の一つである。2001年の初演以来、何度も国内外で公演が行われてきた。それを、今回は彼女自身が踊るのではなく、国立舞踊団のレパートリーとして上演するのだという。

「キム・メジャ先生だけでなく、創舞会の他の先生たちも稽古に駆けつけています。素晴らしい舞台になると思いますよ」

関係者の話からもキム・メジャと国立舞踊団双方の意気込みが伝わってきた。当日、1500人収容の大ホールは満員となった。韓国人に最も親しまれてきた「沈清伝」、パンソリの切ない響きと舞踊家たちの力強い身体表現は、素晴らしかった。カーテンコールに立つ出演者たちの笑顔は眩しく、誰もが唸るような舞台だったことは間違いない。

ただ、私は何故かもやもやしており、その理由はこの原稿を書く今になってわかった。私はキム・メジャ本人の『沈清』が見たかった。彼女がパンソリと一緒に狂ったように踊るのが見たかったのだ。

もちろんキムメジャが振付家としても一流であることは誰もが認めるところだし、それも彼女の大切な仕事だ。でも、ファンはやはり、彼女が何歳になろうとも、その踊る身体が見たいと思うのだ。



キム・メジャの苦悩の10数年

 話を前回の続きに戻そう。1990年代初頭、キムメジャは大学をはなれ、一人の舞踊家として生きていく決意をしていた。ところがそれは簡単なことではなかった。莫大な資金を使ってポスト劇場を建て、国際フェスティバルを開催し、メディアの注目を浴びた。ところで、その華やかな旅立ちは舞踊家としてのキム・メジャに、予想外の苦悩を強いることになった。

後に彼女は日本の京都で行われたシンポジウムで、それについて語っている。

「創舞芸術院の創立当時、私はポスト劇場で舞踊手として悔いなく踊るだけと決めていた情熱を心深くしまい込み、芸術院の運営に邁進する苦悩の10数年間を過ごし、新たな作品を作る余力がまったくありませんでした」(『舞台芸術』2013年春号)

このシンポジウムは「越境する伝統――韓国舞踊の場所から『金梅子の仕事』」という題名で、2011年2月10日・11日の2日間にわたって日本の京都で行われた。企画を発案したのは山田せつ子、彼女が所属する京都造形大学・舞台芸術研究センターの主催だった。シンポジウムでは、キム・メジャと創舞会による『サルプリ』『チョンボムⅡ』『舞その神明』『光』の4作品が上演されるとともに、キム・メジャ自身による「60年、私の舞」というレクチャーも行われた。

その講演の全記録は、京都芸術大学発行の『舞台芸術』掲載はされており、リードにはキム・メジャが「伝統と現代の関係性とどのように向き合い、どのようにしてその舞踊芸術を発展させてきたのか」、「それは舞台芸術の未来を考える我々にとって示唆に富むものになった」とある。

学術的にはその通りなのだが、今、講演記録を読み返してみると、あらためて彼女の舞踊家人生がまさに苦労の連続だったことがわかる。周囲の無理解、バッシング…。多くの先駆者たちと同じく、彼女もまた「孤立」や「孤独」を引き受け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手を差し伸べてくれた友人たち

アーティストの中には、孤独を自分の住処にする向きもあるのだろうが、キム・メジャはそういうタイプではない。つねに人とのつながりを大切にする人だった。

「キム・メジャ先生は義理堅い人なんですよ。友達をとても大事にする。誤解を受けやすい面もあるとは思いますが、本人はとても繊細だ」

山田せつ子の義弟である南相英の言葉だ。友人たちは「苦悩の10数年」の間も、彼女を支え続けた。

 「私はたくさんの友人たちに支えられてきました。なかでも日本の友人たちは、私が本当に大変な時に助けてくれた。山田せつ子夫妻はもちろんですが、その友人の八木夫妻。そして高橋巌、志村ふくみ、笠井叡など日本人智学協会の人々。あと、岩波ホールの高野悦子さんもとても大切な友人でした」

キム・メジャは初回のインタビューから繰り返し、これらの人々の名前をあげていた。1988年にキム・メジャの日本初公演を実現させた八木忠栄についてはこの連載の5回目にとりあげた。その他の人々には今回はじめてご登場いただくことになるのだが、このうち私にとって少し意外だったのは、高橋巌と志村ふくみ両人とのキム・メジャのつながりの深さだった。

高橋巌は日本におけるシュタイナー研究の第一人者であり、日本人智学協会の創立した人だ。志村ふくみは染織家の人間国宝、彼女もまた人智学に強い影響を受けていた。もともとは山田せつ子の師である舞踊家・笠井叡を介した関係だったが、いつしか二人とキム・メジャは非常に親しい友人となっていた。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