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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다카하시 이와오와 시무라 후쿠미



"대학을 그만두고 새로운 극장을 만들고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가장 힘들었던 때 다카하시 선생님이나 시무라 씨가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1992년 다카하시 선생님이 저를 인지학협회의 국제학술교류회에 초청하여 일본에서 무용공연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필자는 슈타이너에 대해서는 유아교육 분야에 대해서만 약간 알 뿐 그 외에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 지면에서 '인지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일본의 고명한 슈타이너 연구자가 김매자의 춤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연은 매우 흥미롭다. 두 사람 다 이미 90세를 넘은 고령 때문에 인터뷰는 삼갔지만, 대신에 국립도서관 등에서 몇 가지 자료를 찾을 수가 있었다.

다카하시 이와오는 80년대에 한국에서 유학도 했으며 한국에 대한 글도 많이 썼다. 그의 글에는 항상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 있었는데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한국어를 배우는 의미'라는 신문 칼럼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일본민족이 한국과의 관계를 오직 현재와 미래와의 관계에서만 바라보면서 과거를 무시하는 한 역사는 일본 민족에게 세계 역사적 사명을 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일본인은 한국어를 배움으로써 그와 같은 과거가 현재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뛰어난 민족문화를 말살하고자 했던 일제시대 일본인의 권력충동에 대항해서 한국어를 지키던 사람들의 감정의 에너지가 오늘의 한국어 속에 담아 있기 때문이다." ― (「서울신문」 1988년 7월 26일)

한편, 수필가로 유명한 시무라 후쿠미는 한국문화에 대한 감명을 글로 적었다. 1992년 12월 「아사히신문」에는 김매자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시무라의 '한국 춤에 놀라움과 선망 - 흰 천은 자기 영혼과 슬픔을 추다'라는 수필이 게재되어 있다.

"살풀이의 간소한 의상, 정적으로 진행된 동작의 억양, 흰 천을 끊임없이 흔들며 혹은 품고 혹은 허공에 던지면서 끝까지 흰 천과 함께 춤추다. 그 무용수는 흰 천을 자신의 영혼으로 간주하는가. (중략) 한국어도 모르고, 한국 춤에 대해서는 완전한 아마추어였지만, 몸에 사무치게 느낀 것이 있었다." ―(「아사히신문」 1992년 12월 26일)

시무라는 처음에 본 한국 춤에 대한 놀라움과 감동을 말하고 또한 이를 지키는 김매자에 대 해서도 언급했다.

"김매자 씨처럼 전통을 토대로 하면서 오늘 한국에 걸맞게, 그리고 세계에도 통할 수 있게 젊은 사람들과 함께 무용의 근대화를 실천하고자 하는 그 과감한 의지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아사히신문」 1992년 12월 26일)

'경의'은 바로 이 연재의 주제이다. 진정한 우정은 서로에 대한 경의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이든 국가 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생님은 춤을 추셔야 합니다"

지인과 친구들은 김매자의 '과감한 의지'에 경의를 표하며 열심히 응원했지만 극장 경영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특히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의 영향으로 한국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연말에는 IMF에 의한 긴급 지원을 받아 국가 부도의 악몽은 회피했지만, 연쇄 도산, 구조 조정으로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쳤다.

"온 나라가 힘들고 저도 극장이 넘어가려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치 인생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는데 그때 재팬 파운데이션의 고바야시 다츠아키 씨가 '선생님,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일본에 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라'며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재팬 파운데이션은 1996년부터 아시아의 중견 아티스트나 지식인의 리더를 일본에 초빙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했고, 고바야시는 그 프로그램 참가에 대한 이야기를 김매자에 꺼낸 것이다. 극장과 컴퍼니 문제에 휘말린 김매자에게는 아주 뜻밖의 제안이었다.

이후 2005년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으로 순회공연을 갔을 때 김매자는 고바야시 다츠아키를 초대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왜 내게 일본에 가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고바야시는 "선생님은 아티스트니까요. 춤을 추셔야죠" 이 한마디만 하고는 사라졌다.

"미국으로 옮겨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나는 눈을 뜨고 일본에 갔습니다."

그 일화는 고바야시답다. 필자도 당시 고바야시와 무대예술에 관해서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있다. 그는 공무원 중에는 드물게 연극이나 무용 같은 신체예술을 아주 사랑하고 열심히 본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만나고 싶어 재팬 파운데이션에 문의를 했지만 이미 조직을 떠났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당장은 알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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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高橋巌と志村ふくみ


  「大学をやめて、新しい劇場を作り、精神的にも経済的にも一番大変だった時、高橋先生や志村さんが本当にいろいろ助けてくれました。1992年、高橋先生が人智学協会の国際学術交流会に招請してくれて、日本での舞踊公演を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踊る場を作ってくれたことで、辛い時期を乗り越え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私自身はシュタイナーについては幼児教育に関することを若干知るだけで、残念ながらここで「人智学」について語れることは何もない。しかし、日本の高名なシュタイナー研究者がキム・メジャの舞踊に深く感銘を受けたという事実はとても興味深い。二人もすでに90歳を超える高齢のため、インタビューは差し控えたが、代わりに国立図書館などでいくつかの文献にあたることはできた。

高橋巌は80年代に韓国留学もしており、韓国について書いたものは多い。そこには一貫して日本の過去の植民地支配への反省があり、たとえばソウルオリンピックを前に留学中の韓国で新聞に掲載されたコラムには、「韓国語を学ぶ意義」について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る。

「日本民族が韓国との関係をもっぱら現在と未来との関係だけで見ようとする限り、過去を無視する限り、歴史は日本民族に対して、大きな世界史的な使命を委ねようとはしないであろう。(中略)日本人は韓国語を学ぶことを通じて、そのような過去が現在の中に生々しく生きていることを実感させられる。なぜならひとつの優れた民族文化を抹殺しようとした日帝時代の日本人の権力衝動に対抗して、韓国語を守り続けた人たちの感情のエネルギーが今日の韓国語の中に籠められているからである。」 ― (『ソウル新聞』1988年7月26日)

一方、随筆家としても名高い志村ふくみは、韓国文化への感銘を日本のメディアなどで語ってきた。1992年12月の朝日新聞には、キム・メジャに招かれて韓国を訪問した時の感想が、「韓国舞踊に驚き・羨望――白布は自己の魂と哀しみを舞う」というタイトルで掲載されている。

「サルプリの簡素な衣裳、静けさを伴う振りの抑揚、白い布を絶えず振りながら、あるいは抱き、あるいは宙に投じ、最後まで白い布と共に舞う。あの踊り手は白い布を己の魂と見立て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った。(中略)言葉もわからず、韓国舞踊については全くの素人であったが、身に惻々(そくそく)と伝わるものがあった。」 ― (『朝日新聞』1992年12月26日))

志村は初めてふれる韓国舞踊への驚きと感動を語り、さらにそれを守るキム・メジャへについても言及している。

「金梅子氏のように伝統をふまえつつ、今日の韓国にふさわしく世界にも訴えることのできる舞踊の近代化を若い人々と共に実践しようとする果敢な意志に敬意を表したいと思うのである。」 ―(『朝日新聞』1992年12月26日)

「敬意」は、まさにこの連載のテーマである。真の友情は互いへの敬意なしには成立しない。それは個人でも国家間でも同じである。



「先生は踊らなけれななりません」

支援者や友人たちは皆、キム・メジャの「果敢な意志」に敬意を示し、一生懸命応援もしたのだが、劇場経営は常に危機の連続だった。特に1997年、アジア金融危機の影響で韓国社会は未曾有の混乱に陥った。年末にIMFの緊急支援を受けて、国家的倒産の悪夢は回避したものの、 相次ぐ倒産、リストラで、街には失業者があふれていた。

「韓国中が大変で、私も劇場を手放さなければならない状況でした。まさに人生最大の苦境だったのですが、その時に ジャパンファウンデーション(国際交流基金)の小林立明さんが声をかけてくれたのです。先生、日本に行きませんかと。」

ジャパンファウンデーションは1996年より、アジアの中堅アーティストや知識人のリーダーを日本に招聘するプログラムを実施しており、小林はそのプログラムへの参加をキム・メジャに持ちかけたのだった。劇場やカンパニーの運営問題で頭がいっぱいのキム・メジャにとっては、寝耳に水の話であった。

結果的にそれがキム・メジャを生かすことになった。

「小林さんは恩人です」

当時は無我夢中で言われるままにしたが、7年後の2005年にキム・メジャは、東京で再会した小林にあらためて聞いたという。

「どうしてあの時、日本に行けと言ったのですか?」

「先生はアーティストだからです」

その一言だけ言って、小林はいなくなったという。

「その後、アメリカに転勤になったと聞きました。あの一言に私は目を覚まされたのです」

小林らしいなと思った。当時、小林とは舞台芸術の件で何度か話をしたことがあったが、あのタイプの公務員には珍しく、本当に芝居やダンスが好きな人だった。久しぶりに会いたいと思って、ジャパンファウンデーションに問い合わせたのだが、すでに組織を離れており、すぐには消息がわからないということだった。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