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ㆍ글 : 河島伸子 (同志社대학 경제학부 교수)
프랑스는 유럽제국 중에서도 특히 문화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정책의 입안, 실시 등이 대통령과 문화부의 관료기구를 통한 국가 주도형이라는 점도 유명하다. 이번 편에서는 프랑스 문화정책의 기원과 발달의 역사를 개관하고, 현재의 문화정책을 지지하는 행정기구를 설명하겠다. 마지막으로 근간에 특히 중요시되고 있는 몇 개의 정책과제를 다루려고 한다.
1. 문화정책의 역사와 발전
[1] 패이트로니지(patronagy)에서 문화부로
영국편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유럽 대륙의 문화정책의 기원은 교회와 왕후귀족의 패이트로니지, 시민혁명 후의 국가통일운동, 복지국가성립 이 세가지로 볼 수 있다. 프랑스는 이 세가지 모두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
17~18세기 절대주의시대의 예술문화는 왕가ㆍ귀족의 영광과 권력을 상징하기 위한 도구, 또한 살롱문화의 사교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특히 루이14세의 시대에는 극단, 오페라컴패니 등이 왕가의 보호를 받았다. 그 시기에 왕가의 패이트로니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발전한 대표적인 예술단체로 프랑스 연극의 중심적 존재 코메디 프랑세즈를 들 수 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특권적인 계급의 손 안에 있던 예술, 문화를「국가」화 하는데 공헌했다. 예를 들어 궁정이나 귀족이 사적으로 보유하며 자신들만 즐기던 극단이나 무대는 국가의 것이 되고, 국가가 세금으로 자금을 내주게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도 이 같은 경로로 성립되었다.
이렇게 프랑스에서는 문화에 대한 국가적 간섭이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니지만, 그것이 본격화되어 조직적으로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 성립기에 들어서 이다. 교육부의 몇 가지 부문을 통합한 문화부가 창설된 것은 1959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 영화관계의 국가기관으로 산업부에 속해 있던 CNC(프랑스 국립영화센터)도 문화부에 흡수되었다. 초대장관으로 문필가 안드레 마를로가 취임하고, 당시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과 함께 프랑스 정부가 전통적인 문화(무대예술, 시각예술, 미술관ㆍ박물관, 고문서, 건축물 등)를 지키면서 새로운 예술문화의 창조를 장려하고, 그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해 나갈 결의를 표명했다.
이 시기의 문화정책은 특히 문화의 지방 보급이 중요시 되었다. 때문에 마를로는 프랑스에 100개 가까이 있는 모든 현에「문화의 집」(Maisons de la culture)을 만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문화의 집」이란 음악, 미술전, 연극 등 다양한 문화활동이 하나의 장소에서 열리고, 시민이 그곳에서 자신의 문화창조활동을 할 수 있는 복합문화센터를 상정하고 있었다. 영화상영을 위한 홀도 설치하고, 다른 예술문화에 비해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오락인 영화를 통해 다른 문화도 친숙해지게 하자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금면에서 충분치 않고, 운영방법ㆍ프로그램 내용 등이 각지의 실정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등의 이유로, 마를로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하고 겨우 9개 정도의 센터가 만들어 지는데 그쳤다.
그 후, 1969~1981년 사이에는 9명이나 문화장관이 취임했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 다른 중점적 목표가 세워지면서 프랑스의 문화정책은 확산되어 갔다. 특히 1970년대에는 프랑스에 전통적인 문화, 즉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엘리트 적인」문화에 대한 반발이 생겨난 시대였다. 이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일고 있던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 포함된다. 문화정책에 있어서는 마를로가 생각했던 문화센터는 위로부터의 문화 전파로 생각되어 오히려 커뮤니티의 문화적 가능성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관심이 높아져 갔다. 예를 들어, 도서관, 박물관, 문화활동센터에 비디오 등의 영상활동, 사진, 미술ㆍ공예, 음악 등에 대한 시민의 아마추어 활동을 지원하게 되었다.
[2] 1980년대 이후
1981년 선거에서 사회당이 승리를 거둠에 따라 프랑스의 문화정책은 크게 발전해 간다. 그 전 시기의 문화정책에 눈에 띄는 특징이 없었던 것에 반해, 1980년대~1990년대 전반에 걸친 문화정책은 프랑스 사회전체에서도 그 존재감을 높혔다. 이러한 존재감의 강화는 다음과 같은 시책형태를 통해 일어났다. 첫 번째가 문화예산의 확대, 두 번째가 문화정책의 대상이 되는「문화」의 정의 확대, 세 번째가 문화를 경제발전과 관련시키는 것, 네 번째가 영상산업(방송, 영화 등)에 대한 개입확대, 다섯 번째가 지방 문화행정의 추진이다. 미테랑 대통령이 지명한 새로운 문화장관 포스트와 같은 쪽에 선 사람이 당시 30대의 젊은 피, 연극 페스티발디렉터였던 자크 랑이었다. 랑은 일종의 시대의 총아로 프랑스 국외에도 알려졌다.
1982년에는 문화예산은 배로 늘어나서 그 때까지 국가예산의 0.5%정도 였던 것이 1%로 뛰었다. 오늘날까지 이 수준을 지켜오고 있어, 선진국 중에서도 톱레벨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즉 1981년에는 26억프랑 이었던 문화예산은 1993년에는 138억프랑이 되었다. 이러한 예산확대에 의해「그랑 플로제」로 루브르 박물관의 확대개장공사, 라 빌렛의 과학박물관ㆍ산업박물관 등의 건설, 바스티유 신국립오페라극장의 개설 등 빠리를 문화적으로 대개조하는 다양한 사업이 이루어졌다.
두 번째「문화」의 정의확대는 특히 랑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랑은 문화는 일상생활에서 동떨어진 한 부분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의 생활전반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문화는 소위 하이아트에 한정되지 않고 대중문화, 생활문화, 패션, 식사, 록음악을 포함하고 서양적 문화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창조되거나 공연되는 세계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옛날부터 권위있는 오페라 등의 국가적문화기관에 대한 보조금을 비롯, 서양적인 전통을 세우는 문화활동에 대한 지출이 줄어든 것은 아니고, 새로운 문화가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한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랑이 정한 해의 어떤「음악페스티발의 날」에는 프랑스 각지의 거리에서 록, 프랑스 민속음악, 모로코음악, 인도음악, 브래스밴드, 앙상블 등의 퍼포먼스가 펼쳐져서 문화부의「문화」의 개념 확장을 나타내는 데는 충분했다.
네 번째의 특징으로 든 문화산업에 대한 접촉도 랑의 개인적인 생각이 강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랑은 공적인 자리에서 몇 번인가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반대를 표명하고, 상업적문화에 대한 대항수단으로써의 정책을 제창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영화산업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미국제 상업적 프로그램이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에 불쾌감을 표시하고, 유럽 전체에서 미국대책의 필요성을 논했다. 곧 문화부는 방송, 영상부문에 대한 책임을 포함하여 문화ㆍ커뮤니케이션부로 개조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영화제작자들에 대한 보조금 증가, 제작비의 차관보증, 영화제작 투자에 대한 세제우대조치, 텔레비전 방송의 민영화 등을 이루었다.
다섯 번째 지방의 문화행정 발달, 문화활동 장려를 목표로 지방분권이 한층 진행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문화활동이 빠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문화부 시작 이래로 문제시 되던 것으로 이 제정은 항시 정책과제로 거론되어왔다. 전체의 중앙의 문화부 이니시어티브가 강해, 1970년대에 각 광역지방을 관할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화부의 출처기관은 중앙의 행정관으로 채워져 있었다. 1980년대에는 프랑스의 행정전반에 지방분권이 진행되어 지방자치체에 대한 의사결정의 권한 및 재원의 이전이 이루어지게 되어 지방 레벨로 독자적인 문화정책을 전개하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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