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회에 이어 조영남 씨와 이봉우 씨의 대담을 들어봅니다.
유사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을 가져야
(李) 이런 현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조금 걱정도 됩니다. 한국 영화 중에 좋은 작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거든요. 일본의 관객들에게도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趙) 일본을 비롯해서 전세계를 발칵 뒤엎을만한 영화가 나올 거라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아직까지는 타이밍이 그렇지 않다는 거죠. 지금처럼 수 없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현재 충분히 그런 분위기는 조성되어 있다고 보고, 그런 점에서 보면 일본보다는 한국이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특이한 게 나오기가 쉽지 안잖아요. 또 중국 영화계를 보면 첸카이커나 장예모 같은 감독은 벌써 나이가 많이 들었지요. 대를 잇는 젊은 친구들이 맹렬한 기세로 나온다면 오히려 현대 미술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일본, 미국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중국은 앞으로 문화쪽으로 제일 유리하다는 게 제 견해입니다.
(李) 말씀하신 것 같이 중국 영화계의 첸카이커, 장예모는 제 4세대라고 말합니다. 지금 일본에서도 상영중인 Lovers(연인)란 영화도 있지만, 중국 영화는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남자 둘, 여자 하나인 스토리 시대극액션이 주류고,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관객이 조금씩 실증을 내고 있습니다.
(趙)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李) 한국 영화도 같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한국인은 무언가 내재된 아픔 같은 게 있어왔다고 할 수 있겠는데, 영화에서도 같다고 봐요. 슬슬 전혀 다른 장르의 수작이 나올 때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남북 문제를 다룬 영화가 어느 정도 갈까 의문입니다.
제가 7~8년 전에 폴란드에 갔었어요. ‘우찌’라는 지방도시가 있는데, 그곳에 우찌영화대학은 역사가 긴 유럽에서는 유명한 대학으로, 폴란스키나 안제이 와이더 같은 유명 감독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그곳에 아시아 유학생이 3명 있었는데, 모두 한국인인걸 알고 깜짝 놀라 선생님과 얘기해봤는데, 모두 우수한 학생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우찌영화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가도 그런 인재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을 먼저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더군요. 굉장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한국쪽 사회에서는 미국을 우대하니까...그런 걸 보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합니다.
(趙) 문화는 공부하기에 상당히 한계가 있다고 봐요. 그래서 그것 보다 선천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를 돈으로 성공시킬 수 있다면 미국과 일본이 문화를 다 정복하겠지요. 재능이 있다면 폴란드에서 공부해서 만들든, 혼자서 카메라를 가지고 만들든 잘 만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폴란드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과 만난다면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실력이 있다면 왜 못해? 카메라를 사는 걸 못하게 하는 사람이나, 필름을 안 판다고 하는 사람이 없는 이상, 못한다는 건 자신의 문제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거지요.
일본문화는 한국에서 받아들여질까?
(李)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일본에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일본 문화가 어느 정도 한국에서 알려져 있는지 일본 사람도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일본 영화가 한국에서 대성공한 적이 아직 없습니다. 장기간 일본의 대중문화가 한국 정부에서 개방하지 않은 것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작년 1월부터 일본 영화가 한국에서 거의 전면 개방이 되는 등 많이 바뀌었지요. 그런데 앞으로 일본 영화가 한국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趙) 일본 영화는 지금까지 처참할 정도로 참패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은 복잡합니다. 좋아해도 좋아한다는 얘길 할 수 없는 게 한국인의 입장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보아가 양국을 오가고 있고,「겨울연가」가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누렸다는 걸 한국인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한국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상이 일어날거라 봅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일본 사람들한테 이야기 하세요. 아마도 음악이나 영화든 어떤 형태의 문화가 받아들여 질 것 같아요. 지금도 신촌에 가면 일본 노래가 흘러 나와요. 최소한 내 다음 세대에서는 틀림없다고 보고, 언젠가 한번 일본의 대중가요가 히트를 치겠지요. 보아처럼. 타이밍을 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일본에 오기 전에「호텔 비너스」란 영화를 봤어요. 잘 만들었더라구요. 한국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려면 앞으로 10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일본 사람들이 한국말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인간 드라마로서 압도적으로 영화를 잘 만들었어요.
(李) 그 영화가 일본에서도 히트를 했죠. 한국말로 만든 일본 영화가 히트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을 안 했습니다.
(趙) 이번에 일본국제교류기금 초청으로 일본에 왔습니다만, 공식적인 방문이라서 그런지 냉정하게 사물을 비교적 중립 입장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호텔 비너스」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서 아무도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거의 정보가 없기 때문이죠. 저는 한국에 돌아가면 소외당한 이 영화에 대해 투고할 생각입니다. 영화담당기자가「호텔 비너스」를 무시한건 잘못이라고, 그 영화를 잘 봐라! 라고 말하고 싶어요.
기억에 남는 한국 사람들과의 만남
(李) 제가 조선 국적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 영화를 일본으로 배급하게 되어 처음으로 한국에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영화사 사장은 이태원 씨라는 분인데, 6.25전쟁 때 북한에서 남쪽으로 넘어 왔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조총련계 사람이 온다는 걸 재미있게 받아들였죠. 그 때를 돌이켜 보면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 제가 오는 전날인가 안기부에서 전화가 와서 이런 사람이 가니까 적당하게 돌려 보내라고 그랬다더군요. 참 한국의 시스템이 엉터리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살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임권택 감독님도 소개 받고 영화 관계자분을 만나면서 그분들의 심정이랄까?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정열이랄까? 인간적인 면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 영화를 배급하고 있지요. 그 때 저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면 다른 나라의 영화를 배급하게 되었겠죠. 몇 편 실패를 했지만 10년간 계속 해 와「쉬리」로 성공하여, 다른 영화도 잘 되고 있습니다.
마음을 누르는 것이 사라지고
(趙) 저는 공연차 평양에 갔다 왔어요. 평양에서 제일 인기 있는 노래가 뭐냐고 물어봤더니「심장에 남는 사람」이란 노래라더군요. 그래서 공연 때 그 노래를 불렀어요.
(李) 일본과 한국의 문화교류 이야기를 하면서도 반드시 북한과의 교류에도 이야기가 이어지네요. 그렇지만 북한에 대해 일본인은 매우 경계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어서 그런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최근 일본영화를 한 편 제작했는데, 그 소재가 북한의 임진강이라는 노래입니다. 1968년에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포크ㆍ클세더스」라는 그룹이 불렀어요. 레코드로 나왔는데, 이 노래는 형제의 이야기를 다뤘음에도 북한 노래라고 방송 금지곡이 되고, 판매도 금지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요. 그 노래는 지금 들어도 매우 좋은 노래에요. 이 영화는 이번에 부산 영화제에서도 상영합니다. 기회 있으면 보세요.
(趙) 영화 제작도 하시는군요. 언제부터 했나요.
(李) 제작은 92년도부터 하고 있습니다.
(趙) 지금까지 한국에 소개된 영화가 있나요?
(李)「노도지만(のど自慢)」이라는 영화도 제작했어요. 일본NHK에 한국의 전국노래자랑과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어요.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인생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趙) 두 프로그램이 매우 차이가 있어 재미있을 것 같네요. 한국에「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런데 일본 전국노래자랑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일본의 전국노래자랑은 관객도 출연자도 매우 질서 정연한 모습이어서 난 참 신기하다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은 엉망진창이거든요. 나오는 사람도 좀 오버하는 사람이 많고. 어쩜 그렇게 이웃나라인데도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어.
(李) 그「노도지만」이란 영화는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어 굉장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노도지만에 출연하는 사람의 인생, 일자리를 잃어 내일부터 어떻게 살지 모르겠는 사람, 엔카 가수인데 인기가 없어서 노도지만에 나가면 합격할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 등 그런 여러 사연을 가진 등장인물을 다섯 명 정도 설정해서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한국에서 의뢰가 왔는데, 한국에서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가 있으니까 거기에 맞춰 리메이크시켜 달라는 의뢰였습니다.
(趙) 리메이크 해 달라...일본 풍속 그대로 나오는 것 보다 한국을 무대로 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다, 그런 얘기군요.
(李) 그땐 그걸 거절했죠. 이건 이것대로 상영한 후에 다음에 리메이크하면 어떻겠냐고 했는데, 한국영화사에서는 아직 때가 아니다 그랬어요. 나중에 기회있으면 꼭 보세요.
(趙) 저는 전부터 봉우 씨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일본에서 오랬동안 우리 영화를 알리려고 애쓰고 있잖아요. 저는 한국에서 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다음에 초난강 씨하고 봉우 씨를 소개하고 싶어요.
(李) 일본에서 한국문화가 이렇게 붐이 난 걸 보고, 앞으로 한국에서도 일본 문화를 인정해 주었으면 합니다. 한국 매스컴이나 문화계에서 그런 역할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趙) 저부터라도 가능하다면 해야지요. 한국인은 아직도 일본이라면 뭔가 마음에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이번 방문으로 그런게 없어졌습니다. 특히 이번 방문에서 일본에 대한 그런 기분이 내 안에서 싹 가셨어요. 그러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일본 사람을 만나도 편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말이지요.
<사진촬영 : 高木厚子>
遠近(wochi kochi) 제2호(Dec.'04 / Jan.'05)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