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미즈사와 츠토무 (가나가와현립 근대미술관 기획과장)

 

「아시아」의 확대, 그리고 어두움
복잡하고 매우 어려운 테마에 정면으로 겁내지 않고 도전한 기념할 만한 전람회이다. 중국, 대만,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스리랑카, 타이 등 아시아 각지에서 모아진 100점이 넘는 작품이 줄서있는 회장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몇 점의 작품과는 오래간만에 일본에서 재회했다고 하는 오히려 반가운 듯한 인상이「큐비즘」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우선은 나에게는 강하게 남았다. 그러나「모더니즘」회고(懷古)에 빠지는 것은 이 전람회에 대한 기본적으로 잘못된 자세일 것이다.
아마도「아시아」라고 하는 묶는 방법에 당황감을 느끼는 세대도 있겠지만 많은 젊은 세대 관객에게는 가벼운 쇼크를 동반한 미지의 미술체험을 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까?「아시아」라고 하는 단어가 내포하는 확대, 그리고 어두움까지도 발견적으로 향후 한층 더 세부와 전체에 있어서 확인하기 위한 작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힌트가 얼마든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매우 야심적인 테마이며 무리나 모순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기획자들도 충분히 각오한 바이며 오히려 그 위험함이 이 전람회에 기분 좋은 긴장감을 주고 있다.

 

전시 형식에도 표현된「경계없는 대화」
균질적인 시계열로 정제(整除)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안이한 지역별 분류도 거부하고「테이블」「근대성」「신체」「국토」와 같은 주제에 따라서 시공을 넘나들 듯 작품을 늘어놓은 것도 교과서적인 단조로움을 피하게 해서 이 전람회를 성공시킨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전람회의 부제「경계없는 대화」는 전시되는 작품이라고 하기 보다는 우선은 전시 그 자체의 태도에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서 각각의 복잡한 배경을 동반한 작가성은 일단 배후지로 물러나고 우선은 작품성이 선명하게  전면에 부상해 온다.
비센테ㆍ마난사라(필리핀)의「콜라쥐」(1969년), 리화(중국)의 목판화(35년), 김환기(한국)의「론도」(38년), 손포토ㆍ웁파인(타이)의「정치가」(58년)와「여성상」(59년), 주경(한국)의「요란」(23년), 포포ㆍ이스칸달(인도네시아)의「두개의 큐비즘적 나체」(63년), 죠지ㆍ키트(스리랑카)의「반영」(47년), FㆍNㆍ스자(인도)의「검은 여자」(62년) 등의 작품이 발하는 빛은 이번 전시의 문맥에 따라서 각각의 미술사의「예외」취급으로부터 구제되어  더욱 더 심오한 것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일본 근대의 특수성과 아시아 제국과의 호응
그러나 일본 근대의 작품 선정은 약간 박력이 부족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나 자신이 일본 근대의 작품에 나쁜 의미에서 이미 친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명작」이라고 평가된 작품이 이번 전시로 예상치 못한 측면을 엿보게 해서 눈부신 작품 체험으로 인도해 주는 의외성이 부족했다.
도고 세이지(東鄕靑兒)도, 고가 하루에(古賀春江)도, 사카타 가즈오도(坂田一男)도 평소「일본 근대미술」의 영광에 둘러싸인 국내적인 틀에서 벗어나 버리면 오히려 거기에는 일본이라는 아시아 극동에 위치한 도시문화의 산물로서의 특수성이 분명히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빈정거리는 말투가 되어 버리지만 이 전람회의 예기치 못한 공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아시아 제국의 걸작에 대응하도록 한층 더 작품을 선택할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리화의 작품과 호응하는 동시대 일본 근대의 목판화 작품은 반드시 필요했고 작가 18세라고 하는 주경의 경이적인 조숙작「요란(擾亂)」의 미래파, 큐비즘의 혼합 상태는 야나세 마사무(柳瀬正夢)의「5월의 아침과 아침식사 전의 나(五月の朝と朝飯前の私)」와 시대적으로도 양식적으로도 확실히 부합될 뿐만 아니라 무정부적인 사상성의 레벨에서도 어디선가 통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추측도 포함해서 실제로 작품이 나열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김환기의「론도」는 너무나 설명적인 작품 선정이라고 비판될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역시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 작품과의 “듀오”를 연출해 보고 싶어진다. 키트의 선의 아라베스크는 이사무 노구치가 발표 당시 높게 평가했던 1950년대 초의 이노우에 미아미(井上三網)에 의한 일련의 소(牛)시리즈와 크게 호응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디어는 무제한적으로 사례를 샘플링하는 것도 되어 전람회의 형식과 바로 어긋나게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래도 일본 근대에 대해서 보다 한층 발견적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일본 근대미술사의 상투적인 문구에 얽매이지 말고 보다 더 대담하게 작품 선택에 관해서 모험을 시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의 인상에 깊게 새겨진 다른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의 모든 작품들은 그러한 대화를 잠재적으로 강하게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 리화 작 / 목판화 (1935년)

요로즈테츠 고로(萬鉄五郎)가 접촉한 큐비즘의 본질

「아시아 큐비즘」이라는 틀 속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중요한 요로즈테츠 고로 작품에서는「기대어 서는 사람」(1917년)과「나무사이 풍경」(18년)의 2점만이 선택되었다. 그 선택에는 역시 아무래도 불만이 남는다.「테이블」「근대성」「신체」「국토」라고 하는 주제에 따라서 요로즈의 경우라면 그 풍부한 작례(作例) 속에서 모든 참조 예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큐비즘」과 격투하고 그것을「문명적 산물」이라고 간파하면서도 끈질기게 그것과의「대화」를 계속한 20세기 미술의 거인의 모습이 부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카탈로그로 보낸 마츠모토 도오루(松本透)씨의 텍스트「큐비즘에 있어서의 신체」가 명찰(明察)하고 있듯이「대체로 문명에는 선진과 후진,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지만, 문화에는 그러한 차이가 없다」. 요로즈는 큐비즘에서「문화」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소위 모든 유럽적인 형태와 모든 비유럽적인 형태를 도가니에 처넣듯이 해서 큐비즘이라는 유럽적이지도 비유럽적이지도 않은 제3의 무엇인가, 지역성과도 시대성과도 한없이 멀어진 (작자들이 바란) 아직까지 일찍이 지상에 등장한 적이 없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탄생했던 것이다」라고 마츠모토씨가 말하는 큐비즘의 본질과 먼 극동의 일본, 게다가 쯔찌자와(土沢)라고 하는 도호쿠(東北) 지방 작은 마을에서의 제작이 통했다고 하는, 과장해서 표현하면 하나의「기적」을 우리에게 납득시키지 않을 수 없는 창조의 영위였던 것이다.
그것이 도무지 부상되지 않는다고 하는 안타까움을 회장을 뒤로 한 후에도 잠시 동안 씻어낼 수 없었다.「기대어 서는 사람」의 배경의 분절(分節)이 실내라기보다도 요로즈의 1918년 작「창고」와 통할 것 같은, 바깥공기에 노출된 목제의 표면의 감촉을 환기하는 것은 왜일까? 자문자답하면서도 요로즈의 위대함을 생각할 때 그 정도의 사소한 일에만 주의를 기우려 버리는 나 자신의 미술사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이 부족함을 부끄러워했다.

 

「경계없는 대화」가 부상시키는「경계」
회장을 떠나 조용히 훌륭한 작품들의 매력을 기억 속에서 반추해 본다. 이윽고 각각의 작품의 배경이 신경 쓰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각각의 작가들이 놓여져 있었던 시대배경이나 그 굴절을 강요당했을 인생 등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큐비즘은 태환성(兌換性)이 높은 지폐와 같이 어디에서나 변함없이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선택 가능한 양식의 하나의 가능성도 아니었다. 거기에 접한 이상 그 전후로는 접한 인간의 시각의 본질이 변용하는「사건」이었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학문지상주의의 근간을 지지하고 있던 모든 것이 와해되는 듯한 체험을 뛰어난 작품을 남긴 아시아의 아티스트들은 제각기 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때 그래도 거기에 존재하는 것들을 자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창조적인 정신의 운동을 일으키지 못한 화가들은 애당초 큐비즘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 큐비즘은 양날의 검이며, 스스로의 문화적 근거도 일단 제로로 말소해 버리는 듯한 체험을 뛰어난 화가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강요한 것은 아닌가. 예를 들어 이번 도쿄전의 포스터로 선택된 웁파인의「정치가」의 전도상(顚倒像)은 천박한 정치적 풍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변장 자화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한 작품일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화가 자신이 체험한 큐비즘이라는「지진체험」의 증언이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는 타인에게는 간단히 간파할 수 없는 성격의 단절이 있고 큰 도랑이 가로 놓여 있다.
「경계없는 대화」가 나은 훌륭한 소산은 오히려 그「경계」를 엄연히 부상시킨다는 역설. 그야말로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에 흔들리는 정신이 언제라도 정시(正視)하지 않을 수 없는「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큐비즘은 그러한 무수히 박힌 무수한 쐐기들을 정시하기 위한 조형의 무기였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이 획기적인 전람회의 반향이나 심포지엄 등 그 파문의 행방을 주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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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사와 츠토무(みずさわ つとむ)
케이오기쥬쿠대학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미학 미술 사학). 카나가와현립 근대미술관학예원을 거쳐 현직. 제6회 및 제8회 방글라데시ㆍ아시아 예술비엔날레 (1993년, 97년), 제26회 상파울로 비엔날레(2004년) 등의 국제전 일본 커미셔너 역임 외 주요 전람회 기획으로「요로즈테츠 고로전」(95년), 「모보ㆍ모가전」(98년),「빌헤임ㆍ레임브룩크전」(03년),「안테스와 카치나 인형」전(05년) 등 다수. 저서에「이 마지막에도」등이 있다.

 

遠近(wochi kochi) 제7호(Oct. / Nov. 2005)에서 전재

 

 

* 아시아의 큐비즘 전시회는 도쿄전시에 이어 11월 11일부터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개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