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와타나베 고지 (渡邊幸治, (재)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러시아대사)

 

작년 6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중국어 공부를 위해서 북경에 체류했었다. 당초 나이 70을 넘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라는 생각은 스스로도 좀처럼 지울 수 없었다. 또 체류기간 동안 중일관계가 살벌한 시기였기에 주위분들에게 걱정을 끼친 면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가길 잘 했다. 충실한 4개월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하는 그 보고를 겸한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들이다.

 

20년만의 중국어 학습
일찍이 20년 전에 북경대사관에 있었을 때 중국인 가정교사로부터 레슨을 받았던 적이 있어서 중국어에 대한 약간의 기억은 있었다. 그러나 그 3년 동안의 학습에서는 예습, 복습, 숙제는 일절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기초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것도 아니었다.
중국어 습득에 열심이지 않았던 내가 새삼스럽게 중국어를 공부하려고 한 조금은 진지한 이유는 나에게 있어 가장 관심 있는 향후의 미ㆍ중ㆍ일 3국 관계의 이상적인 모습을 생각해 나가기 위해서 중국어를 해 보자, 즉 중국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중국이해로 이어지고, 친구인 야마모토 다다시 씨의 (재)일본국제교류센터에서의 연구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외국어를 배우는 것의 메리트는 젊음을 유지하고 적어도 치매예방 효과가 있다고 하는 점이다. 실은 20년 정도 전에 오가타 사다코 씨로부터「나는 10년에 하나씩 새로운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다」고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이번 북경행의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오가타 씨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그것은 그렇게 하고 싶다는 바램일 뿐 유감스럽게도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라고 했다.

 

북경에의 연착륙
▲ 중국인 박사와 함께
북경에서의 중국어 공부라고 해도, 사전에 주도면밀한 조사와 준비를 하고 간 것은 아니지만, 지난 5월에 1주일 정도 사전 예비조사를 했었다. 숙박처, 가정교사, 대학의 하계강습 등을 소개받았던 적도 있고 해서 6월초 북경에 연착륙.
중국에서는 외국인 체류에 초빙 주(主), 즉 수락 모체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는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이 초청 주이다. 옛 친구인 O원장, Y부원장의 호의로 북경대학의 모던스타일인 동학원의 건물 2층에 있는 연구실을 사용했다. G군과 K군, 이 두 사람의 존재 없이는 이번 북경유학은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주고 친하게 대해 주었다.
29세의 G군은 북경대학 졸업 후 와세다대학ㆍ북경대학 공동박사과정의 제1호. 3년 간 와세다대학에 유학. 전공은 일본정치와 국제관계론. 일본어, 영어에도 뛰어나 작년 9월부터 국제관계학원의 최연소 교원이다.
21세의 일본인 K군은 고교시절의 역전마라톤 선수였다. 굳이 합격한 일본의 유명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고 목표와 희망을 품고 북경대학에 유학. 중국어를 학습한 1년 후 같은 대학의 국제관계학원에 가서 현재 2학년생. 중국어는 중국인도 놀라는 북경어. 북경대학 일본인 학생회장을 하고 있다.
G군에게는 북경공항 도착 시부터 호텔, 학생등록, 가정교사 찾기, 나아가서 학생식당, 매점안내, 휴대전화 구입 등등,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G군은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내가 북경생활에 연착륙 할 수 있게 해 준 최대의 공로자임과 동시에 11월까지의 체류를 통해서 지극히 좋은 이야기 상대이기도 했다.
K군의 향상심과 행동력과 넓은 대인관계, 그것을 지지하는 중국어에는 정말로 감탄했다. 그 덕분에 중국의 매스컴에도 불려나가 그가 통역해 주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와의 식사회수가 가장 많았던 것에 감사하고 싶다. 중국 요리를 혼자서 먹는 것은 정말로 따분한 일이어서 필연적으로 그에게 권유하는 일이 많았다.

 

각국의 젊은이들과 받은 하계강습

▲ 중국어 수업 광경

북경도착이 5월 30일, 4주간의 하계특별강습의 개시가 6월말. 그때까지 G군의 도움으로 두 명의 개인교사에게 부탁해 각각 주2회, 1회 2시간씩 레슨을 받았다. 그 중 한 명이 초급 중국어교육의 베테랑 중국인 여성으로 문자 그대로「니하오」부터 배웠다. 그리고 또 한 명은 G군의 룸메이트인 L군으로 둘이서「인민일보」의 기사를 읽기로 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L군은 6월말에는 정치학 박사가 되어 고향인 운남성의 공산당 서기국에 취직.
6월 26일 오전 하계강습의「분반고시」라고 하는 반 편성 테스트가 있어서 시험을 보았다. 총 인원 170명 모두가 외국인, 3시간의 테스트였다. 결과가 나쁘면 수치라고 생각해서 1개월의 학습을 상기시키며 나이 먹은 보람도 없이 흥분하며 답안지에 답안을 기입했다. 오후에 결과가 발표가 되었는데 뜻밖에 전부 7개 반 중 제4클래스, 즉 준 중급반이 되었다. 솔직히 기뻤다.
다음 날인 6월 27일 제4클래스의 수업이 개시되었고 클래스메이트는 16명, 반수가 한국 외국어학원의 2학년생, 3분의 1이 미국, 캐나다 화교의 자제로 역시 대학생. 그리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여대생. 그리고 또 한 명이 미국 유학중이고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중국어를 공부한다고 하는 기특한 일본인 여고생. 클래스의 평균 연령은 나를 제외하면 아마 19세일 것이다.
71세의 전 일본 외교관이 거기서 직면한 것은 이 클래스의 수준이 자신의 실력보다 훨씬 위였던 일이다. 아마 한자를 읽을 수 있었다는 점과 OX식 시험 운이 좋아서「고시」의 성적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대개의 경우 클래스의 선생님들은 중국어 이외는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구어(口語)와 문장 중국어를 2시간씩, 또한 매회 복습, 숙제, 예습이 기대되는 고난의 날들이 되었다.
우리 친구 G군에게 이 궁상을 전하니,「반 편성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해서 좋아하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말해 두었어야 했는데요」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들어봤자 때는 이미 늦었고, “辛苦, 辛苦(싱쿠, 싱쿠)”의 4주간이었다.

 

중국 젊은이들의 대일 감정
금년 3월 북경유학을 결심했을 무렵에는 아직 중일관계가 나빠진다 내지는 이미 나빠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것이 4월에는 북경, 상해에서 반일폭동이 일어나 중일관계의 분위기는 국교정상화 이래 최악의 상태에 이르고 있다.
중국어 공부라고는 하지만 당연히 중일관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대학의 교수들, 학생들과 좀더 심도 깊은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강했지만 언어문제와 분위기로 봐서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래도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4개월간의 체류를 통해서 나 자신, 개인적으로는 구체적으로 불쾌한 느낌을 받은 적이 일절 없는 충실한 북경체류였다.
5월에 예비조사차 북경에 가서 1주일 체류했었다. 4월의 폭동으로부터 얼마 안 되고 반일데모의 재발이 걱정된 시점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불쾌한 경험은 일절 없었다고 G군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그는「실은 우리들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대단히 기쁘고 안심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단 그가 뒤이어 말하길「단지, 중국인들은 노인들을 공경하니까요」. 이것이 농담이었는지 본심이었는지 지금도 관심 있는 부분이다.
학생들의 의식 속에 있는 대일 감정에는 엄격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6월 중순 신임 O학원장이 미ㆍ중ㆍ일 관계에 대해서 강연했는데, 첫 공개 강의라는 점도 있고 하여 큰 교실이 만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강연내용에 대한 G군의 소곤거림도 주위의 배려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단지 강연 후의 학생들의 질문과 학생들의 반응에는 충격을 받았다.
맨 앞줄에 있던 학생의 질문은「왜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의 유엔안보상임이사국 가입에 반대한다고 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이에 대해서 큰 박수가 있었다. 그날 밤에 유일한 박수가 일어났던 것이다. O원장의 답변은 외교에는 애매한 부분이 필요하기도 한 것이라고 했다. 4월, 일본 대사관에 대한 데모의 기점은 북경대학이 위치한 북경시 해정(海淀)구 중관(中關)촌(중국의 실리콘밸리라고 한다)이었던 일을 다시금 상기했다.

 

두 개의 역사문제
북경에서 생각한 것은 중일 간에는 두 개의 역사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 하나는 1945년까지의 일본 역사, 즉 중국을 침략해서 다대한 고통과 손해를 주었다고 하는 역사. 그 항일전쟁의 역사가 애국주의 교육에 의해서 중국 젊은이들의 의식 속에 잠재적인 일본에의 반발이 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중국인들의 반발 배경을 이루고 있는 역사이며, 또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전후 교육으로 충분히 배우지 못한 부분이다. 일본인으로서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이 역사의 사실을 엄숙하게 받아 들여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중일 간에는 또 하나의 역사문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는 1945년 이후의 일본의 행보, 삶의 방식, 단적으로 말해서 일본이 전후에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는 점을 거의 모른다고 하는 역사인식의 문제이다.
최근 중국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많은 중국인들이 일본에 대해서 연상하는 것은 난징대학살과 군국주의라고 한다. 난징대학살은 규모의 문제는 차치하고 사실로서 부정할 수 없지만 거기서부터 즉각적으로 군국주의를 연상한다고 하는 것은 전후 일본의 행보, 특히 평화헌법, 비핵3원칙과 같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받들고 전후의 폐허로부터 일어서 온 일본국민의 삶의 방식을 사상(捨象)하고 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 북경대학에서 4주간 함께 중국어를 배운 동기들과의 기념촬영

 

4개월간의 중국어 학습의 효과
일본에서의 여름휴가 후 북경대학으로 돌아와 몇 명의 개인교사에 의한 중국어 학습을 계속했다. 그러나 북한에 관한 6자 협의, 일본의 총선거,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문제로 중앙전시대의 영문 TV(영어 방송)라든지, 잡지 인터뷰, 또 중일관계와 매스컴의 역할이라는 타이틀의 인터넷 좌담회에 출석. 어느 것이나 모두 G박사나 K군과 함께 불려나가 두 개의 역사 문제론을 비롯해 나 나름대로 일본의 입장을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북경대학의 일본문제연구회나 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에서의 강연. 그리고 미국출장 등도 있어서 그 결과 중국어의 예습, 복습을 하지 못해서 하계강습과 비교하면 충분치 못한 공부가 되어 버렸다.
나의 중국어는 당초 4개월 정도만 하면 텔레비전 뉴스를 알아듣고 대담 정도는 가능하리라고 꿈꾸고 있었지만, 결과는 좀 멀었다. 그러나 중국 전 국토로부터 우수한 인재가 모이는 북경대학의 캠퍼스에서 젊은 남녀 학생들과 아침저녁으로 스치고 지나며 중국어의 학습을 위해 고생한 것은 젊음은 차치하고 노화방지 효과는 확실히 있었던 것 같다.

 

사진제공 : 와타나베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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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고지
도쿄대학 졸업 후 외무성 입성. 미국 프린스톤 대학, 하버드 대학에 유학. 그 후 남베트남 대사관 참사관, 북미제일과장,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 공사를 역임. 정보조사국장, 경제국장, 사우디아라비아 특명전권대사, 외무심의관, 이탈리아 특명전권대사, 러시아 특명전권대사를 거쳐 퇴관. 일본 경제단체 연합회 특별고문, 국가공안위원을 역임. 1997년부터 현직. (재)국제문화포럼 이사장 겸임.

 

遠近(wochi kochi) 제9호(Feb./Mar. 2006)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