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Les Terry (빅토리아대학 사회과학부 강사, 도쿄대학 객원교수)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학자 험프리 맥퀸 (Humphrey McQueen)은 1988~89년에 도쿄대학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연구프로그램의 주임으로서 교편을 잡고 있던 모습을 자신의 저서인「Tokyo World」(1991년)에 담고 있다. 그 내용 중에서 탐구심이 왕성한 학생에게 왜 일본에 왔는지 질문을 하는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조국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 대해서 전하기 위해서 라고 답하고 있다.
그리고 2006년 4월. 나는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의 맥퀸이 가르쳤던 건물로부터 가까운 곳에 있는 책상에 앉아 일본에서 한 학기를 가르친 지금, 모국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다. 내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본에 온 것은 작년 9월. 그 이후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민족주체성(national identity)을 둘러싼 논쟁이 재연되고 있지만, 그 재연 방법에 당혹해 하고 있다.
다문화 주의의 가치를 의문시하는 사람들
작년 말 시드니 남부의 크로나라에서 젊은이들(일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를 몸에 감고 있었다)이 집단으로 싸움을 하고 있는 영상이 일본에서 방영되었다. 이 영상은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일부 보도에서는, 싸움의 발단이 해변가의 세력권을 둘러싼 현지의 다툼이었다고 전했지만, 그것이 이슬람교 또는 이슬람교로 보여지는 중동계, 특히 레바논계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에 대한 폭동으로 그 자리에서 발전해 나간 것 같다. 보도를 접하고 생각했다. 몇 십 년 동안이나 가슴을 열고 다문화주의 국가의 길을 걸어 온 나라에 이러한 일이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우려하는 것은 단지 폭도들만이 아니다. 일본에 오기 전,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9ㆍ11 사건이나 발리 섬 폭파사건의 영향을 받아서 다문화주의의 가치를 의문시하는 기사가 주요 일간지에 잇따라 게재되고 있었던 것이다.「지ㆍ에이지」지(멜버른에서 발행되고 있는 고급 지)에서는 시니어 칼럼니스트 토니 파킨슨이「우리나라를 시작으로 하는 다문화주의는 중대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고 쓰고 있었다.
한층 더 당혹스러운 일이 있다. 그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도 다문화주의 정책에 상반되는 대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존 하워드 정권 탄생 10주년을 맞이한 금년 3월에,「지ㆍ에이지」지는 하워드 수상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단어를 기분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 지금까지의 연설 중에서 기꺼이 이 표현을 사용했던 적은 없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에는 하워드 수상이「우리는 지금까지 다양성에 너무 구애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 자부심을 가지고 후세에 전해 갈 국민성에 대해서 다시 돌이켜 생각할 때가 왔다」고 주장했었다고도 쓰여 있다.
다문화주의에 대해서 하워드 수상은, 오스트레일리아 보수정권의 리더로서「많은 나라들이 우위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가운데 문화의 다양성도 어느 정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우위인 문화란 즉 유태교와 기독교에 뿌리를 둔 윤리관, 정치 문화에 대해서는 영국의 가치관이며,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아일랜드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떤 정권이더라도 민족주체성(national identity)에 대해서 1788년(시드니 만 부근에 이주 개시. 영국인이 초대 총독으로 취임했다)의 영국 식민지시대로까지 역행시키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혹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관용 표현에 있듯이 수상은 단지「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조사통계국의 통계표 |
백호주의 정책의 마지막과 이민의 유입
70년대 초가 되자「백호주의 정책」의 종말과 함께 라틴아메리카나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제국으로부터도 대량으로 이민이 유입되었다. 인종차별 금지정책이 실시되고 있는 최근 수 십년 동안은 중국, 중동, 아프리카 제국에서의 이민이 증가해, 이민의 종류도 가족을 불러들이거나 경제적인 이유, 인도적 이유 등 이민정책을 반영하여 온갖 카테고리에 미치고 있다.
요컨대 최근 50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이 쇄도하여, 오스트레일리아는 민족적, 문화적인 다양성을 가진 나라가 되었고 그것은 현재도 진행 중이라고 하는 것이다. 2001년에 실시된 국세조사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 약 2000만 명 가운데 4명 중 1명이 오스트레일리아 이외의 곳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부모님의 양쪽 모두 혹은 다른 한쪽이 해외 태생인 국민은 40%이상임이 밝혀졌다.
오스트레일리아 연구가 데니스 알트맨(Dennis Altman)은, 전후의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오스트레일리아는 반세기 동안에 몰타 말투의 조모를 가진 혹은 인도차이나 난민이었던 조부를 가진 국민이 드물지 않다고 하는,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나 지역의 출신자가 있는 나라로 다시 태어났다」라고 적고 있다.
73년에 다문화주의 정책이 내세워졌는데 이것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캐나다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민국가가 된 것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은「여러 민족으로 된 하나의 커뮤니티 (a community of nations)」라고 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민족주체성(national identity)을 생각하도록 요구되었던 된 것이었다.
다문화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문화의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었지만, 그 한편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4만년 이상 거주하면서 지금도 적극적으로 승인과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토착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서 독자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당연히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문화라고 하는 골조 속에서 단순히 하나의 민족으로 보여 지는 것에 저항했던 것이다. 다문화주의는 그 이전에 원주민이나 영국계 이외의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에 대해서 행해진 동화정책(다만 선주민과 영국 계 이외의 이민에 대한 동화정책은 다르다)과는 달리 포스트 콜로니얼(탈식민주의) 국가로서의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서 생각하는 발판이 되는 것이었다.
민족주체성(national identity)과 다문화주의
「The Sentimental Nation」의 저자이며 보수계 역사학자이기도 한 존 허스트(John Hirst)는 오스트레일리아가 공화제가 되었다고 해도 영국 연방의 나라였었다고 하는 과거의 역사는 잊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고 발언하고 있다. 허스트는 그 이유를 헌법, 의회, 교육, 사법제도 등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요 제도가 영국의 전통이 원형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오스트레일리아가 공화국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영국과는 우호적으로 결별하고 공화제로 이행하는 것으로 영국에서 계승된 유산인 입헌제도를 오스트레일리아 독자적인 것으로 할 수 있다. 군주는 군림해도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본래 영국의 것인 제도를 영원히 존중하는 것이다」라고 공적인 장소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다문화주의 연구가인 존 스트랏톤(Jon Stratton)과 이엔 앙(Ien Ang)은 70년대 초에 다문화주의 정책의 도입이 시작된 것은「영국」신화가 퇴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어필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라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러했다고 말한다.
그 외 스티븐 캐슬즈(Stephen Castles) 등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적어도 40년대 중반부터 문화의 다양성이 일반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특색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영국의 전통을 기본으로 하는 단일의 민족주체성(national identity)이라고 하는 것은「잘못된 아이덴티티」였다고 논하고 있다. 캐슬즈는 우론곤대학 다문화연구센터 소장이었던 1995년에 시드니에서 개최된「세계의 다양성」에 관한 회의에서, 20세기에 발생한 대규모의 국경을 넘는 이주에 의해 많은 나라에서 문화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했다. 그 변화는 예측되지 못했던 것으로 불안은 커녕 오히려 위협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발언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분야의 많은 연구자와 함께 다문화주의 정책은 특히 민족적 혹은 문화적 소수파가 실제 사회에서 공평한 찬스를 얻는 제도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질 경우 사회를 결속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제언하고 있다.
캐슬즈와 마크 밀러(Mark Miller)는 그의 저서「The Age of Migration」에서, 1947년부터 60년대 후기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동화정책이 대대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동화정책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민 전원이 하나의 민족주체성(national identity)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지만,「그것은 환상임이 밝혀지고 있었다. 각 이민 집단 마다 그 언어나 문화가 2세, 3세로 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각각 문화단체를 설립하고 예배소를 만들어 에스닉 비즈니스(Ethnic Business)를 시작하고 그에 따라서 소수민족으로서의 기반이 한층 더 강화되게 되었던 것이다」.
캐슬즈에게 있어서 다문화주의란「단일민족ㆍ단일문화 국가라고 하는 신화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는 다문화 주의에 대해서「국민국가(nation state)라고 하는 골조 속에서 민족이나 문화의 차이를 컨트롤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느 민족이 어느 영역을 점유한다고 하는 영토원칙이 추궁 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로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다문화주의는 “개인의 주된 아이덴티티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것을 들고 있다. 다만 그 표현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또 다문화주의 정책에서는 영어가 항상 공용어로 여겨져 민족이나 문화의 차이는 공통의 제도 속에서 타협을 붙이는 것이 최선으로 여겨져 왔다.
역대 정권과 다문화주의 정책의 변화
70년대 초두부터 오스트레일리아의 역대 정권은 그 정치적 신념을 불문하고 다문화주의를 지지해 왔다. 다만 자세히 보면 다문화주의 오스트레일리아라고 하는 목표는 같아도 정당에 의해서 달성 방법으로서의 구체적인 시책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레이저 정권(보수당. 1975~83년)은 민족마다의 통합을 기반으로 한 민족학교나 민족적(ethnic) 미디어 등을 장려해서 각각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 한정적인 접근방식을 선택했다. 공공방송국 SBS(Special Broadcasting Services) 가 이 시기에 탄생해서 지금도 양질의 다언어ㆍ다문화적인 프로그램(텔레비전 및 라디오)을 계속 방송하고 있는 것도 그 예이다.
다음의 호크 정권(노동당. 1983~91년)에서는 법제도, 교육, 의료 등 제 제도나 행정 서비스에 있어서 소수자를「주류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추진을 위해서 1989년에 발표된「다문화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한 내셔널ㆍ어젠더(The National Agenda for a Multicultural Australia)」에서는, 영어학습을 추진하고 언어교육 프로그램을 개선하는 구상이 제안되었다. 그리고 초중등 교육과정에 있어서 다문화주의 사회의 생활에 대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변경하는 일도 지지를 받았다. 또 이 어젠더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해서 다양한 사회정책 분야에서 통ㆍ번역 서비스 충실에 힘을 쓸 것과 미디어 개혁 등이 제언되었다.
전 정권의 폴 키팅 정권(노동당. 1991~96년)이 되자 다문화주의 정책은 국내의 여러가지 문제 해결에 대응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과거와 결별하고 근린의 아시아ㆍ태평양 제국과의「제휴」의사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 단계에서는 이미 자국의 미래는 아시아ㆍ태평양지역과 함께 있으며 옛 종주국인 영국과의 문화, 무역, 외교의 연계는 희미해졌다고 하는 인식이 국내에 퍼지고 있었다. 일찍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주된 무역 상대국이라고 하면 영국이었지만, 무역의 주역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제국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관계만이 아니었다. 정치면이나 문화면에서도 인연이 깊어지도록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학교에서 아시아 언어가 받아들여지고 대학에서 아시아 연구열이 높아졌던 것도 이 시기이다. 키팅 전 수상은 이런 사고방식의 변화에 대해「오스트레일리아의 안전과 번영은 항상 우리를 둘러싼 나라들, 즉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에서 최대한으로 구축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국익은 거기에 집약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1996년의 선거에서 선출된 존 하워드를 수반으로 하는 현 정권(자유당ㆍ국민당 연합)은 공약으로 다문화주의를 지지하고 있으며 문화면과 사회정의 측면을 중시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지만, 보다 더 의식을 하고 있는 것은 경제면이다. 2003년에 발표된「다문화 오스트레일리아: 다양성 속의 통일(Multicultural Australia: United in Diversity)」이라고 하는 정책에서는 테러와 안전보장 문제가 중심이며,「오스트레일리아의 다문화주의 정책은 국가단결의 골조가 되는 것으로 평상시 및 유사시 어느 때에도 다양한 오스트레일리아가 시종일관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이라고 정부는 확신하고 있다. 국가의 안전보장은 국내사회의 조화로부터 시작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지 정책문서만큼 공식적이지 않은 장면에서는 전통적인 국민국가의 이미지가 분명하게 국민들 사이에서 부활하고 있다. 하워드 수상은 오스트레일리아가 다양성의 이미지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발언하고 있지만, 이 발언은 다문화주의에 대한 태도에 현 정권이 양손을 들어 찬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 많은 표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또 얼마 전 하워드 수상은 역사교육은 역사적 사실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발언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이란, 수상이 생각하는「우리의 공통 유산」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영국 유산을 가리키고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수상만이 아니다. 브렌든 넬슨 전 교육부 장관도「오스트레일리아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 학교에 오스트레일리아 국기를 게양하는 것을 추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발언, 다시금 고조되는 영국 군주제에 대한 경의의 기운은 보수정권이 다문화주의 이전 시대의 민족주체성(national identity)으로 퇴보하는 움직임을 취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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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치가에 의한 언동이 눈에 띄어도 일반적으로는 다문화주의는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의 장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의회의 사회정책에 관한 컨설턴트를 맡고 있는 로버트 홀튼(Robert Holton)과 같은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민의 상당수는 다문화주의 정책을 폐지하는 것에 반대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사회의 다른 그룹끼리의 교류를 도모하는 수단으로서 다문화주의 정책은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작년 12월, 시드니에서 폭동이 발생한 후에「지ㆍ에이지」지에 게재된 어느 조사 결과에서는 인종차별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수상의 견해에 찬동하지 않는 국민이 몹시 많은 점과 다문화주의 정책은 특히 시드니나 멜버른이 있는 동부의 주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모으고 있는 점이 밝혀졌다.
또 금년 3월에 멜버른에서 개최된 스포츠 영국연방대회(영국연방에 속하는 나라나 지역이 모여 4년마다 실시하는 스포츠 국제대회)에 즈음하여 영국 연방의 골조를 의식하는 것으로써, 오스트레일리아가 장래에 공화국으로 이행해야할 것인가의 여부가 다시 정치적 논점이 되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다.
공화제로 이행하는 것이라면 영국과의 과거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향후 어떤 정권이 오스트레일리아에 탄생해도 지금까지 오스트레일리아가 민족이나 문화의 차이라고 하는 과제에 오랜 세월 씨름 해 왔던 것에 안이하게 등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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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Terry (레스 테리)
오스트레일리아 다문화문제연구소, 빅토리아주 교육성 다문화교육국, 빅토리아주 윤리문제위원회를 거쳐 현직. 2005년 10월부터 1년 임기로 도쿄대학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부속 아메리카태평양지역연구센터(CPAS) 객원교수로 일본에 체재중. 최근 저서에는 아이덴티티의 문제 등을 1950년~60년대 오스트레일리아 가족의 시점에서 그린 논픽션『The Remarkable Resurrection of Lazaros X』가 있다.
遠近(wochi kochi) 제11호(June/July 2006)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