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하루키 붐
글 : 김춘미 (고려대학교 일본학연구센터 소장)
세계적인 하루키 현상을 생각해 본다
이번 심포지엄은 오랜 기간 후지산과 게이샤, 그리고 사무라이의 나라로 알려져 온 일본이 세계적으로 그 문화를 보급시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안내인의 한 사람인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 씨의 지적대로, 패전 후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시작하여 소니, 마츠시타, 도요타 같은 하드산업으로 세계에 진출, 테크놀로지 국가로 알려지게 된 일본도 소프트산업의 진출은 늦어져 닌텐도, 미야자키 하야오, J-POP이라는 일본의 팝컬쳐나 서브컬쳐가 해외에 진출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요모타 씨는「경제대국이지만 문화대국이지 못한 열등감」이라고도 표현하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국제적인 붐을 이들 서브컬쳐의 세계적인 진출이라는 커다란 문맥 안에서 평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애니메이션, 만화, J-POP 등의 서브컬쳐와 하루키 문학을 같은 레벨로 평가해도 괜찮은지 라는 문제와 애니메이션, 만화, J-POP, 하루키의 세계적인 진출이 정말 일본에게 문화대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주었는지 라는 문제가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심포지엄은 텍스트 분석, 가치판단 등을 하는 문학연구회가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를 사회과학적으로 논하는, 즉 세계에 통용되는 문화기호로서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현상을 외부에서 논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연구자라는 입장보다 한국의 하루키 번역자라는 입장으로 국제적인 붐이 된 하루키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에서의 폭발적인 인기
▲ 필자가 한국어로 번역한『해변의 카프카』 |
학생운동 후의 허탈감 속에서
왜 이토록 하루키를 읽고 있는 것일까요. 전공투(全共闘)운동에서의 좌절감과 상실감, 그리고 그 후 소비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겪었을 정신적 갈등을 그린 하루키 문학이 89년경의 한국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학생운동에 투신, 일본에서는 성공한 학생운동이라고 평가 받았으나, 정권교체(학생운동의 최고조로 나오게 된 87년 민주화 선언을 거쳐, 대통령 선거 직선제가 실시되었다)를 실현한 후의 허탈감, 허무감에 사로잡힌 한국 젊은이들의 고뇌, 탈정치화, 탈역사화로 진행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 상실과 그 공백을 채운 소비욕, 풍족하면서도 공허한 사회 분위기를 하루키 문학은 정곡을 찌르듯 표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90년대 한국의 하루키 독자들은 당시 386세대(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30대인 사람들)라고 불린 이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30대, 40대 전반이 된 지금도 하루키 마니아를 자칭하고 있으며 그 때문인지 남성 독자가 많은 것도 한국의 특색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하루키의 독자 중에서 신세대 작가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60~70년대에 태어난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 90년대 한국문학연구의 필수항목으로서 하루키 문학이 평가될 정도로 그 영향은 컸다고 봅니다. 그들의 작풍, 표현기법 등이 표절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나,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이 하루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하루키 마니아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86세대인 그들 중 20대에 하루키를 읽고 마니아가 된 사람이 많은 이유는, 그들이 하루키가 지닌 상실감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하루키 붐은 중ㆍ고교생에까지 이르렀으며『노르웨이의 숲』은 지금도 여전히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어 있습니다.
중고생은 중고생 나름으로, 대학생은 대학생 나름으로 동시대를 호흡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동료의식, 연대감과 공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올해의 신입생에게 물어보니 대학에 들어가면 하루키의『노르웨이의 숲』과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라고 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이데올로기 소실에 의한 좌절감과 상실감 조차 없어진지 오래인 18, 19세의 학생들이 왜 아직도『노르웨이의 숲』과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을 필독서로 읽고 있는지 흥미를 끄는 부분입니다.
세대차 때문인지 386세대의 열광적인 지지에 비해 읽은 후의 반응도 둘로 나뉘어져, 너무 재미없었다, 외설소설인줄 알았다 라는 학생도 있는가 하면, 재미있어서 하루키의 다른 작품도 읽기 시작해 점점 마니아가 되어간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 「하루키를 둘러싼 모험 – 세계는 하루키를 어떻게 읽고 있는가」심포지엄에는 많은 관객과 보도진들이 모여들어 열기 가득한 이벤트가 되었다. 필자는 한국의 하루키 붐을 소개하며 수용 본연의 자세에 대하여 발표했다. |
사회적으로 정착한 하루키 붐
최근에는 하루키의 작품이 한국 학생들의 필독서가 된 사태를 우려하는 논문이 5월 25일 한국예술원 세미나에서 전 이화여자대학교의 영문과 교수이며 현재 연세대학교 한국문학과의 석좌교수인 유종호 씨에 의해 발표된 것은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문학의 전락 – 무라카미 현상을 놓고」라는 논문에서 유교수는 하루키 작품의 1인칭 화자가 토마스 만의『마의 산』을 읽고 있는 장면을 들어, 생의 모든 국면에 대해 깊은 사색을 전개하고 있는『마의 산』과『노르웨이의 숲』은 완전히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청년시절은 좌절을 경험하고 미래의 전망도 불투명한, 불안과 방황의 계절이다. 그러한 불안의 시기에 경미한 우울증상을 보이는 마음 약한 젊은이들에게 이 책은 마약과 같은 단기간의 안이한 위로를 제공하리라. 우리는 누구나 죽음과 실패와 허무 앞에서 평등하다 라는 생각은 위안이 될 것이다. (중략) 다수의 독서목록 중의 하나로 무라카미의 소설을 언급한다면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염려되는 점은 많은 학생들이 가장 감명을 받았다는, 혹은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는 책으로 그의 소설을 드는 점이다. (중략) 『노르웨이의 숲』에 매료된 독자들은 그 소설의 화자가 읽고 있는『마의 산』을 결국 읽지 않게 될 것이다.」
한 때 떠들썩했던 순수문학논쟁을 떠올리게 하는 논문입니다만, 이 논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보다는 예술원이라는 근엄한 장소의 세미나에서, 한국의 지(知)를 대표하는 석학이 하루키 문학 붐이라는 현상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 자체에 관심이 갑니다. 즉 이것은 하루키 붐이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서 한국에 정착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도 자본주의 세계의 새로운 문학
국적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요모타 씨가 이야기한「무취성」이라는 키워드 만으로는 세대를 초월한 침투력을 설명하기 힘들지 모릅니다. 하루키 문학은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만, 그 비판은 고통에 찬 절규로 표현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냉정합니다.
현실에 등을 돌리지 않고 지금 여기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모색하는 그의 문학은, 상실감과 더불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하나의 계시가 된 것은 아닐런지요. 하루키의 등장에 의해 그들은 자신의 문제의식과 고뇌를 공유하는 문화 기호, 자신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을 정확하게 꼬집어 말로 표현해 주는 문화기호를 손에 넣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문학평론가 장석주 씨는 역사, 신, 이데올로기 같은 절대적인 가치가 붕괴하고 집단에서부터 개인으로, 이데올로기로부터 욕망으로 질주하는 고도자본주의세계인 현재, 하루키 문학은 새로운 문학의 상징이며 기호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감성은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국의 특수한 현실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도시생활을, 보편적으로 통용하는 문화상품의 이미지에 의해 그린 하루키 문학은, 세계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단계로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국경을 초월한 문화상품으로서의 파급력이 커질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5년 9월 19일자 한국의「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70년대 이후에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 없는 시기를 보냈다. 이제부터는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역사와 도덕(moral)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역사와 도덕이라는 인류보편의 과제와 동시대적으로 공진하는 하루키 문학은 앞으로 더욱 전세계에서 주목 받을 것입니다.
하루키 이전의 일본 작가들이 번역은 되었지만 이 정도까지 사랑 받지 못했던 것은 인류 보편의 문제를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는 일본 국내에서의 작가의 평가와 해외에서의 평가 간의 괴리라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 한국의 어느 출판사가 만든 무라카미 하루키 관련서적을 소개하는 팸플릿. 자사 간행의 소설이나 에세이, 다른 저자에 의해 발표된 작품 평론 등 30여권이 넘는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에서 출판된 무라카미 하루키 관련 서적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
사진촬영 : 다카기 아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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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미
1984년, 고려대학교대학원 국문학박사과정 수료, 문학박사. 도쿄대학교 객원연구원,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객원교수 등을 거쳐 85년부터 고려대학교 일본문학과 교수. 2005년부터 현직을 겸함. 연구자로서 일본문학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는 것 외에 무라카미 하루키의『해변의 카프카』, 다자이 오사무의『인간실격』등을 번역. 어린시절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의 전근을 따라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다.
遠近(wochi kochi) 제12호(Aug./Sep. 2006)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