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인하 (만화평론가)
단행본 시리즈 만화를 그자리에서 읽어버리는 한국 스타일
2007년 3월 서울에 오픈한 만화전문점이자 카페이기도 한 <Comic Cozzle>. 한국작품은 물론 일본만화 번역서 등, 4만점 가까이 진열되어 있다. 한국에서 시리즈 누계 100만부를 돌파한 화제작 『神の雫(신의 물방울)』(아키다다시 원작)의 특설 코너도 마련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일본만화는 낯선 미지의 문화가 아니라 아주 일상적인 엔터테인먼트다. 수 십 년전 한국 만화인 것처럼 국적을 숨기고 출판되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만화의 원산지는 물론 작가와 출판사 등에 대한 정보도 정확히 밝히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 일본의 잡지 시스템이 도입된 이후 잡지연재와 책 출간으로 이어지는 만화 출판 사이클도 동일하다. 더 나아가 서구만화와 달리 흑백에 장편 시리즈로 연재되는 근본적인 만화문법도 동일하다. (다만, 재책방법의 차이로 인해 일본만화는 우에서 좌로, 한국만화는 좌에서 우로 읽는다.) 일본만화는 2007년 현재 한국에서 가장 친근하고 일상적인 엔터테인먼트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등장한 몰아보기시장(대여시장), 온라인 만화시장, 어린이용 기획만화시장과 같은 한국만화시장의 지형 변화는 일본만화를 수용하는 한국적 방식을 정착시켰다.
만화를 시리즈로 대량소비하는, 즉 몰아보기 독서는 일본에는 없는 한국에만 있는 일본만화의 독특한 수용방법이다. 일본의 경우 잡지연재시 잡지구독과 함께 단행본 구매를 통해 만화를 소비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잡지에 연재되지 않는 수많은 일본만화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독자들은 이 만화들을 시리즈로 소비한다. 일본만화의 경우 일본에서 연재가 시작된 신간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정도 연재가 진행되어 인기가 검증된 작품들이 주로 출간되기 때문에 시리즈의 만화를 한꺼번에 소비하게 된다. 이같은 시리즈 중심의 대량소비방식은 90년대 중반 만화대여점(만화를 돈을 받고 빌려주는 업태)의 확산과 함께 일반화되었고, 최근에는 오프라인 만화대여점 뿐만 아니라 온라인의 만화대여점도 다양하게 확산되어있다.
일본만화는 60년대부터 수정된 형태로 출판
최근 몇 년간 일본만화는 한국에서 특별한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없다. <리니지>, <라그나로크>와 같은 M.M.O.R.P.G.(온라인다중접속롤플레임게임)가 게임중독이나 불법적 아이템의 거래 등과 같은 강력한 사회적 이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만화는 다양한 논란거리를 제공했었다. 특히 폭력과 선정성 논란은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논란은 대부분 진지한 연구를 기반으로 제기되기 보다는 흥미위주의 기사거리로 기획되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일본만화가 유행이라서 청소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막연한 주장이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보도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본만화를 즐기는 당사자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일본만화 유해논쟁은 꼭 일본만화여서 문제가 되었다기 보다는 만화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반영이라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한국에서 만화는 오랜 세월 동안 철저히 구분되고 제한된 영역의 문화였다. 만화는 어린이들이나 보는 매체였으며(현실적으로 성인용 만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어린이용 매체 중에서도 유독 어린이들의 공부를 방해하는 불량한 매체로 취급당해왔었다. 만화가, 만화편집자, 만화출판사, 만화유통사는 종종 일반 문화계, 출판계 종사자와 구분지어졌다. 이런 저급한 사회적 인식은 만화계 종사자들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 그 중 하나가 한국만화의 불행한 유산이기도한 일본만화 모작과 불법출판이다.
60~70년대, 일본의 인기만화들이 한국에 불법적으로 출판되었다. 당시 일본문화의 유입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었던 시기. 일본의 인기만화들은 한국 만화가들에 의해 다시 그려져 가공의 작가이름을 달고, 때때로 다른 제목으로 각색되어 출판되었다. <거인의 별>, <내일의 죠>, <바벨 2세>, <유리의 성>과 같은 만화들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대표적인 일본만화였다. 일본적인 분위기나 그림은 철저히 수정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한국독자들은 조금의 의심도 하지 못하고 한국만화인줄 알고 만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청소년문화의 상징이 된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
봉인된 일본만화의 실체를 적극적으로 찾아낸 것은 수용자였다. 7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 특히 도시에 거주한 이들은 애니메이션, TV, 어린이 잡지, 만화, 컴퓨터게임과 같은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며 자랐다. 만화방에서 빌린 만화가 전부였던 부모 세대와 달리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겼던 이들은 90년대 PC통신, 인터넷과 같은 전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했다.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의 간섭이 최대한 배제된 자유로운 공간속에서 사이버 커뮤니티를 형성했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의 영역을 넓혀갔다. 이 시기, 한국에 새로운 만화출판 자본이 형성되었다. 90년대에 접어들며 몇몇 신생 만화출판사들이 일본의 대형 만화출판사와 협력관계를 통해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아 ‘합법적’으로 일본만화를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일본문화 개방이전이었으므로 한국에서 법적으로 불법이었지만, 만화는 어린이나 즐기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한 제재를 받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드래곤볼>과 <슬램덩크>와 같은 대형 히트작이 한국에 소개되어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일본만화의 인기는 사이버 커뮤니티를 통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수많은 동호회에가 생겨났고, 개별 작품의 팬 사이트가 만들어졌다. 특히 이 시기, <신세기 에반겔리온>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아니메 열풍은 일본만화와 아니메를 90년대 청소년 문화의 트렌드이자 아이콘으로 끌어올렸다.
세계 최고의 만화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 인기가 검증된 일본만화의 상업적 경쟁력은 탁월했다. 특히 만화로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는 일본만화의 다양성과 잡지연재를 통해 가다듬은 이야기의 빠른 전개는 한국만화에서 맛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재미였다. 일본만화가 보여준 어떤 제약도 없이(심의로 인해 내재적 가이드라인을 갖게된 한국만화작가들에 비해) 묘사되는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는 완고한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는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을 사로잡았다. 이런 것은 하면 안된다는 수많은 규범으로 둘러쌓인 일상의 공간과 달리 원초적인 파괴욕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만화의 공간은 일상의 세계에서 탈출하는 청소년들의 가장 손쉬운 탈출구였다.
감각적 이미지를 최대한으로 살리는 일본만화의 독자적인 미학
일본만화가 청소년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고전적이고 엄숙한 서사체를 해체한 뒤 보여주는 감각적 이미지에 있다. 매력적인 캐릭터, 쉽고 간단히 이해되는 줄거리에 캐릭터의 세세한 이미지를 전달해 주는 정교하고 치밀한 연출, 파괴적이고 파격적인 폭력장면의 묘사 등은 모두 감각적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일본만화의 독특한 미학이다.
청소년을 중심으로 시작된 일본만화의 인기는 자연스럽게 보다 많은 독자들로 확대되어갔고, 한국의 일상적 엔터테인먼트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2007년 한국의 일본만화, 더 나아가 2007년 한국의 만화는 90년대와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다. 변덕많은 청소년 독자들은 더이상 만화를 자신들의 문화 아이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만화산업보다 더 큰 자본을 보유한 드라마나 영화산업은 황당함, 과장됨, 파괴적인 폭력, 해피엔딩, 신파적 연출과 같은 만화가 지닌 대중적 미학을 빠르게 흡수했다. 최근 한국에서 최초로 개봉해 인기를 끈 <트랜스포머>는 만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화려한 그래픽과 음향으로 무장한 영상물이나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이 접속해 즐기는 온라인 게임은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며 만화가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세계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게다가 장르만화를 끌어갈 잡지만화 시장은 불황에 직면해 있고, 온라인 만화는 포털 사이트의 무료 콘텐츠로 안착해 버렸으니 이래저래 2007년 만화의 길, 특히 대중적 장르만화의 길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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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만화평론가)
1995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이후 만화평론, 만화기획, 컨설팅, 교육, 전시기획 등의 일을 진행했다. sicaf, difeca 등에 기획자 및 전시큐레이터 등으로 참여했고, 2003년에는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한국만화특별전에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2001년에는 한국만화복간프로젝트를 기획했으며, 2004년에는 <경향신문>에 한국최초의 만화섹션 ‘펀(FUN)'의 창간을 주도했다. 2002년부터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로 청강국제만화교류연구소를 통해 국제교류와 국제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으며, 청강만화스튜디오를 통해 기획만화 창작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 <꺼벙이로 웃다, 순악질여사로 살다>, <장르만화연구>, <박인하의 만화풍속사 골방에서 만난 천국> 등이 있다. |
「をちこち」제19호(Oct./Nov.'07)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