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경제성장의 과도기에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
후지이 히데타다(藤井淑禎) 릿쿄(立教)대학 문학부 교수 도요하시(豊橋市)시 출생.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 문학부 졸업. 릿쿄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근현대 일본문학·문화 전공. 주요 저서로『세이쵸(清張) 분투하는 작가』 『트로이카 가요영화의 황금시대』『소설의 고고학으로』『경관의 고향사』등이 있다. |
국민을 북돋우고 고무시키는 치어리더와 같은 존재
어떤 사람을 국민적 여배우라고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뉠 것이다. 국민적인 인기? 물론 이것도 완전히 상관없지는 않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팬이 많다는 것 만으로는 어딘지 미덥지않은 느낌이다.
내가 생각하는 국민적 여배우는 일종의 국민의 치어리더적인 존재이다. 바꿔 말하면 국민을 북돋우고 고무시키는 존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보면 예를 들어 하라 세쓰코(原節子)씨나, 야마모토 후지코(山本富士子)씨, 와카오 아야코(若尾文子)씨 등은 국민적 인기는 있지만, 내가 말한 정의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이에 해당하는 사람은, 어떤 시기까지의 요시나가 사유리 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최신작 『엄마(母べえ)』까지 포함하면, 요시나가씨의 출연작은 111편에 달하는데, 나는 그 중에서 일정 시기까지의 요시나가씨를 국민적 여배우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많은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요시나가씨도 어떤 시기부터는(이라고 해도 상당히 옛날 이야기이지만) 성숙한 여배우나 어두운 역할 도전에 대한 기대를 받게 되었던 것 같다. 본인도 그럴 생각으로 많은 고민도 했던 것 같다.
『한가지 꿈』(1988년)등의 수필집을 읽어보면, 66년작 『백조』(니시카와 가쓰미(西河克己)감독)에서부터 그런 조짐이 보인다. 아직 20살을 조금 넘겼을 때의 일이다.
내가 국민적 여배우로 평가하는 요시나가씨의 출연작은 실은 전부 그 이전의 작품이다. 왜냐하면 다른 등장인물과, 나아가서는 관객을 격려하고 때로는 질타하며, 힘차게 등을 떠밀어 주는 역할은 그 이전 작품에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그 대표작으로 『언제나 꿈을(Full of hope)』(노무라 다카시(野村孝)감독, 63년 1월 개봉)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보는 사람을 분발하게 만드는 격려의 메시지
이 영화에서 요시나가씨의 역할은, 서민동네 개업의사의 양녀 역인데, 준간호사로 일하면서 양아버지를 돕고 있는 야간고등학교 학생이다. 학업과 일을 양립하기 위해 애쓰는 그녀(이름이 히카루이기 때문에 피카짱이라고 불린다)는 자신의 일 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친구들의 일을 헌신적으로 보살핀다. 하마다 미쓰오(浜田光夫)씨가 연기한, 동네 공장에서 일하는 같은 반 친구(갓짱)가 야간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 취직시험에 실패하자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위로하며 격려한다. 아니, 그런 일로 좌절해서 되겠냐는 식으로 등을 힘껏 친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두 남동생을 보살피는, 마쓰바라 치에코(松原智恵子)씨가 분한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같은 반 친구(아키짱)가 과로로 각혈하면서 쓰러졌을 때도 요양소 입소와 구청의 수속을 대신 해준 것도 피카짱이었다.
아키짱은 한때는 비탄에 젖어 있었지만, 피카짱이 병문안을 갈 즈음에는 상당히 기운을 차리게 되고, 병 상태가 그다지 중한 것은 아니라고 친구에게 밝게 알려준다. 피카짱과 함께 요양소 정원을 걸으며, 아키짱은 도서관에서 읽었다는 야간학교 학생이 지은 시를 피카짱에게 들려준다.
“이른 봄 꽃들의 새싹이 깊은 눈 속에서 피어나듯이, 우리들의 기쁨은 매일의 어려움 속에서 단련되어진다네”
비록 힘들고 괴로운 매일을 살아간다고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봄이 찾아오고 꽃이 핀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지만, 역경에 자칫 좌절하기 쉬운 젊은이들을 힘차게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
피카짱과 야간고등학교 선생님(나이토 다케토시(内藤武敏) 분)이 병에 걸린 아키짱을 문병하는 장면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다. 비관하고 있는 아키짱을 격려하려고 선생님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북돋운다.
“손바닥을 햇볕에 비춰 보렴. 붉은 피가 가득 흐르고 있지않니. 살아있다는 증거란다. 이 힘에 지지 않을 만큼 건강해져야지”
어디에선가 들어본 노래 구절과도 비슷하지만, 아무튼 역경에 처한 젊은이들을 고무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임에는 틀림 없다. 취직시험에서 실패한 갓짱과 결핵이 발병한 아키짱, 역경 속에 있는 두 사람을 응원하는 피카짱, 그리고 나아가서 작품이 던지고 있는 격려의 메시지는, 보는 사람 모두의 마음을 기운나게 만든다.
『언제나 꿈을(Full of hope)』에서는 이러한 고무적인 메시지를 그야말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언제나 꿈을(Full of hope)』이라는 제목과 주제가에서도 그렇지만, 압권은 야간제 고등학교 하교길에 요시나가, 하마다, 마쓰바라 등의 출연자들이 그 외의 많은 출연자들과 함께, 십여 명이 요시나가씨의 히트곡 ‘추운 아침’(사에키 다카오(佐伯孝夫)작사, 요시다 타다시(吉田正)작곡)을 합창하면서 공장가의 밤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북풍 불어오는 추운 아침도
들 넘어 산 넘어 봄은 오네
움츠려 있지 말고 손에 손을 잡고
가슴 가득 희망으로
북풍 속에서도 부르자 봄을
북풍 속에서도 부르자 봄을
아키짱이 가르쳐 준 ‘언젠가는 반드시 봄이 찾아오고 꽃이 핀다’라는 야간제 고등학교 친구가 지은 시와도 통하는 내용으로, 자신들을 포함해 역경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힘찬 응원가이다.
게다가 이 장면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늘어선 순서가 재미있다. 앞쪽에는 자전거를 끌고 있는 요시나가씨가 걸어가고, 그 조금 뒤에 하마다씨, 그리고 그 뒤가 마쓰바라씨. 그 외에 많은 연기자들은 자신들의 역에 맞춰 세 사람을 정점으로 삼각형을 이루면서 정연하게 진행하는, 서열 사회를 엿보게 하는 모습이 매우 흥미롭다. 게다가 한편으로 이 장면은 어딘지 모르게『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아류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회의 과도기에 국민적 여배우를 원했다
『언제나 꿈을(Full of hope)』을 비롯하여 요시나가씨가 국민적 여배우였던 시대는, 사회적으로 고도경제성장이 한창이던, 이른바 과도기였고 사회 곳곳에서 신(新), 구(舊)가 대립하던 시기였다. 어머니와 남동생 둘을 가녀린 아키짱 혼자 돌보아야 할 정도로 사회복지는 뒤떨어져 있었고, 갓짱은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야간 고등학교 학생은 닳고 닳았다는 이유로 취직에서 떨어지는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한편에서는 ‘언젠가는 반드시 봄이 찾아오고 꽃이 핀다’는 조짐같은 것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키짱은 무사히 요양소에 입소하고 퇴원할 시기도 가까워졌으며, 갓짱도 다음 기회에는 정말 희망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영화가 개봉하고 몇 개월 후에 야간제 고등학교 출신자를 차별하지 않도록 정부의 결정이 내려졌다). 구태의연한 것도 아니고, 구폐를 일소한 것도 아닌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과도기인 것이다.
그러한 과도기였기 때문에 좀 더 참으면, 또는 조금 더 노력하면(꿈은 이루어진다) 이라는 응원가가 현실감이 있었고, 이를 보고 듣는 사람들을 고무시켰을 것이다. 이 시기보다 조금 더 일찍이었다면, 사람들을 격려한다 해도 세상을 바꾸는 것이 어려워 보였을 것이고, 조금 더 나중이었다면 이미 상황이 개선되어서 격려 따위는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 요시나가 사유리씨가 ‘국민적 여배우’로서 다방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은 그러한 과도기적인 시대가 배경이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꿈을(Full of hope)』에서 나이토 다케토시씨가 연기하는 야간제 고등학교 교사의 수업 장면에서, 1911년에 공포되고 노동시간 제한 등을 담은 공장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전쟁 후에는 근로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법률이 점차 정비되고 있다고 학생들에게 말하는 장면도, 서광이 비취고 있는 이러한 시대 특유의 과도기적 성격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요시나가씨가 국민적 여배우였던 시대는, 사실은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기운나게 하는 국민적 여배우가 필요한 시대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20살이 될까 말까한 사유리씨가 생기 발랄한 고무형 캐릭터와는 다른 느낌의 성인 역할을 지향하고, 더 나아가서 어두운 역할을 소화하는 여배우로 탈피하려고 했던 것은 필연적인 흐름이었을지도 모른다. 과도기의 종언과 함께 국민적 여배우를 필요로 하던 시대는 일단 종말을 고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시대는 다시금 국민적 여배우를 필요로 하는가
그러면 여기에서 눈을 현재로 돌려보자. 항간에서는 『올웨이스-3번가의 석양(Always - Sunset On Third Street)』을 시작으로 쇼와(昭和) 30년(1955년)대를 회고하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요시나가씨가 국민적 여배우였던 바로 그 시대이다. 그러나 그러한 회고의 대상은, 컴퓨터 그래픽과 세트장이 훌륭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데서 상징되듯이, 오로지 건축물과 대도구·소도구 등의 즉물적인 것에 한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을 되돌아보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고도경제성장=효율 제일주의, 물질적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공리주의가 일단 좌절하고,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기 시작한 현재에 되돌아보아야 할 것은 그 정신이 아닐까.
게다가 젊은이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걸핏하면 무기력에 빠져, 1965년대에 학원분쟁으로 대표되는 사회개혁 바람이 휘몰아치던 에너지 넘치는 사회 상황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현대는 다시금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용기를 주는 국민적 여배우를 필요로 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엄마(母べえ)』의 요시나가씨가 60세 가량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이러한 큰 역할에 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예전의 요시나가씨와 같은 존재가 혜성처럼 나타나서 우리들을 고무시키고 밝은 미래로 이끌어 주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역할이 단순히 연기자만의 문제라면 그러한 소질을 가진 사람은 몇 명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스토리이다. 『언제나 꿈을(Full of hope)』과 같은 향일적(向日的)인 스토리가 과연 오늘날도 가능할 것인가. 이렇게 하여 문제는, 현대 문학이 안고 있는 아포리아(난문)로 연결되어 가는 것이다.
「をちこち」제21호(Feb./Mar.'08)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