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는 번역으로 어떻게 단련되는가(2)

 

 

■ 서투른 원문을 그대로 번역할 것인가 매끄럽게 번역할 것인가 ■
고노스 서투른 문장을 그대로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번역자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온 패러독스입니다. 『번역재고(再考)』를 저술한 프랑스의 언어학자 베누티는 번역은 이언(異言)이어야 한다, 트랜스한 것처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그런 이언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잘 다듬어진 번역문이라는 것은 순치(馴致, 길들임)이며 사실은 그 나라의 언어와는 다른, 이질적인 것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읽기 어렵게 번역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은 잘 한다는 느낌이지요(웃음). 그렇게 하고픈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우선 편집자에게 엄청난 불평을 듣게 되겠지요.
매끄럽게 다듬어진 문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같은 것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번역자는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딱딱한 번역은 오역과 마찬가지로, 마치 이단심문이라도 받는 것 같은 비평을 받게 되지요. 그런 것들과 싸워나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파워가 필요합니다.
가메야마 그래도 예전의 번역자들은 편하고 스트레스가 없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조금 틀리면 어때’라면서 술이라도 마실 수 있었지요(웃음). 그런데 지금은 한 군데라도 오역이 있으면 바로 인터넷에 오르는 시대니까요. 우리 시대에는 어떠한 시도도 끊임없이 비판을 받습니다. 번역자의 스트레스는 몇 십배, 몇 백배에 달합니다.
고노스 옛날에는 굉장히 심한 오역도 출판되었는데, 모든 단어를 적당하고 깊이 없이, 바르게 커버하는 것 보다는, 오역도 있지만 강렬한 비전이 있어서 그것을 일본에 뿌리내리게 한, 그런 번역이 더 위대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전부 원문의 어순에 따라 번역하는 것은 위험하다 ■
가시마 문체에 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원문에도 문체가 있고, 번역자에게도 문체가 분명히 있으니까요.
가메야마 그렇지요. 자신의 문체와 원문의 문체가 물과 기름처럼 다르다고 해도, 오히려 그런 좋지않은 궁합이 훌륭한 번역을 만들어내는 예도 있습니다. 러시아 문학에서 보자면 하라 타쿠야(原卓也)씨는 원문에 매우 충실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노스 뒤에서부터 번역해 나가는, 이른바 ‘뒤부터 거꾸로 번역하기’지요.
가메야마 그것이 아주 좋은 느낌으로 완성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는 완전히 막혀버립니다. 번역자의 개성이 그 작가의 어떤 부분과는 괜찮지만, 이 부분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면서, 하나의 번역체 안에 어쩔 수 없이 균일하지 않은 부분이 생기곤 합니다.
가시마 최근의 경향은 뒤부터 번역하는 것은 좋지 않고, 원문의 어순에 따라서 내려 번역하라는 것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뒤에서부터 번역하는 편이 문장이 깔끔해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노스 일본어 화자에게는 어순의 뒤에서부터 듣는 편이 머리에 더 쉽게 들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걸 무리하게 앞에서부터 번역해가면 오히려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게 되지요.
가메야마 하지만, 내려 번역하기는 편합니다. 다음 문장에서 접속사를 잘 연결시키면 되니까요.
고노스 내려 번역하기는 관계성을 애매하게 둔 상태로 번역할 수 있죠.
가메야마 관계성이 애매한 상태로 연결시켜 나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내려 번역하기는 위험합니다.


■ 하이(High) 상태로 얼마든지 번역할 수 있는 순간 ■
가시마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번역속도가 빠른 것은 굉장히 고마운 일이지요. 아무리 정확하고 좋은 번역이라도 몇 십년이 걸리면 곤란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번역을 하던 시절에 ‘가시마야의 규동 번역’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맛있고, 빠르고, 싸다(웃음). 번역을 할 때 어느 정도의 속도감은 필요합니다. 시간을 계속해서 들이다 보면 처음과 끝부분의 문체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메야마 그렇습니다. 저도 카라마조프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문체가 바뀌었습니다. 2년 동안에도 조금 달라진 것이지요.
고노스 ‘트랜스레이터즈 하이’가 되는 경우는 없으신가요. 러너스하이(Runners’ High)가 있듯이, 얼마든지 더 달릴 수 있겠다고 느끼는 상태 비슷한.
가메야마 있습니다. 모스크바에 7일 동안 있으면서 300장 가까이 번역했습니다. 하루에 18시간, 35장. 역시 원고를 쌓아올려서 더미를 만들어야 진척이 되는 느낌이 들지요.
가시마 굉장하네요. 제 경험으로는 하루에 10장 이상 하면 오역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문체도 흔들리게 되구요.
가메야마 피곤하다보니 작은 부사 하나를 빼먹거나, 긍정문을 부정문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오역 체크를 위해 교정을 5고까지 보았습니다.
가시마 처음에 저는 영역 SF물을 번역하면서, 번역으로 문체를 다졌습니다. 어떤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였더니 ‘중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다시 번역해 주세요’라고 하더군요. 아, 번역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그 번역 일을 소개해 준 사람에게 번역의 비결을 물었더니, ‘우선 좋은 유의어사전을 입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번역가들에게는 분명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가메야마 지금은 구글 검색 등으로 본인의 일본어가 맞는지 어떤지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어떨까 생각하면서 검색을 해보면 보편적인 표현인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좀 모험을 해서 번역해볼까 라고 생각할 때에는, 역어가 적절한지 알기 위해 반드시 검색엔진을 돌려봅니다. 유의어사전의 역할을 검색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
고노스 저는 인터넷의 유의어사전 사이트를 이용합니다. 정밀도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요. 하지만 결국 어려운 번역일수록 유의어사전은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니어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원문을 번역할 때에 더 많이 사용합니다.


『어린왕자』의 신번역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 메이지시대에는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
가시마 메이지시대 번역에서 유명한 사람이 구로이와 루이코(黒岩涙香)입니다. ‘나는 숙독 음미한 후에는 일절 보지 않고 해왔다’고 본인이 말했습니다(웃음).
고노스 ‘나는 원서는 보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겼지요(웃음). 루이코는 번역자라기보다 저널리스트입니다. ‘요로즈쵸호(万朝報)’(1982년 창간된 일간신문)의 발행인이었으며, 그에게는 번역도 저널리즘이었던 것 같습니다. 외국의 덤핑 책 같은 시리즈물을 잔뜩 사와서는, 집 안에 ‘독파 서재’를 만들어 놓고 틀어박혀 읽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안목에 맞는 책은 100권 중에 한 권 밖에 없다고 호언을 했지만, 자기 주장을 담는데에 안성맞춤인 작품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시마 『철가면』은 좋은 선택이었지요. 정작 작가인 포아고베를 프랑스 사람에게 물어보아도 잘 모릅니다.
고노스 그렇죠. 그래서 어느 정도 원문을 읽고 나서, 머리 속에 집어넣고는, ‘나는 원서는 보지 않는다’라면서 원문을 신문사에 두고, 집에 가서 번역해 신문에 연재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번안에 가깝지만, 그에게는 번역이었지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순문학이 아니라 대중소설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것을 독자에게 제공할 것인가 라는 철칙을 갖고 번역했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듣더라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가시마 그 시대 번역의 흥미로운 부분입니다만, 등장인물을 일본인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고노스 그야말로 괜찮은건지 모르겠지만, 런던은 히비야가 되는 식이지요. 『프란다스의 개』에서 네로는 ‘기요시(清)’, 파트라슈는 ‘부치(班)’였습니다(웃음).
가시마 다이쇼시대 중엽까지는 그런 번역이었습니다. 프랑스 문학자인 이다 기켄(飯田旗軒)이 졸라의 『L'Argent』을 『돈』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습니다. 고서(古書)라 비쌌기 때문에 2만엔이나 주고 사서 읽었는데 정말 많이 웃었습니다. 전부 구로이와 루이코 스타일로 이름을 바꿔서 주인공인 사까르는 ‘사가라도코베에(相良床兵衛)’, 사까르를 적대하는 군데르만은 ‘군다이사부로우에이몬(郡代三郎右衛門)’이라는 식으로 비슷한 음을 넣어서 일본식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대는 그대로 파리이고, 증권거래소의 시계가 울리면 사가라도코베에가 레스토랑에 들어 옵니다(웃음).
가메야마 재미있군요.


■ 번역이란 자신의 내면에 타자(他者)를 키우는 일이다 ■
가시마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외국 언어와 충돌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영어를 할 수 있으면 된다’면서 젊은 사람들이 외국어와 충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어를 단련시키는 데 있어서도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고방식이나 체계가 다른 외국어를 일단 수용하지 않으면, 일본어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도 더 풍요로워질 수 없습니다.
고노스 번역으로 언어가 훈련되는 측면이 있지요. 오랫동안 일본어 소설에서는 3인칭을 사용하는 것이 어렵다고 여겨졌지만, 메이지시대부터 백년이 넘도록 억지로 쓰다 보니 3인칭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0년쯤 전에 번역을 시작했는데, 이를테면 예전에는 ‘그는 슬프다’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서 슬픈 것인지 말하지 않으면 일본어로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게 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J·M·쿠체의 경우는, 전부 묘출화법적인 현재형 삼인칭으로 쓰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아무튼 그런 예가 아니더라도, 불과 20여년 동안 일본어는 번역을 통해 단련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시마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씨도 다듬어졌지요.
고노스 그렇습니다. 미국의 에드거상 후보에도 오른 기리노 나쓰오(桐野夏生)씨도 단련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시마 단지, 작가가 번역을 매개로 하지 않고, 외국어에 직접 접촉하여 일본어가 새롭게 되는 경우는 없어진 것 같습니다.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씨의 시대가 전형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불어로 원문을 읽는 영향이 문체에 나타나는 경우가,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게 있을까요. 번역은 자성적인 요소가 상당히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스가 아쓰코(須賀敦子)씨의 경우, 기질적 면에서 번역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상당한 로맨티시즘 일변도의 작품을 썼을지 모릅니다. 요컨대 번역은 타자를 자신 안에 키우는 일입니다. 타자가 없으면 자기가 비대해집니다.
가메야마 타자가 없다면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타자를 수용하는 괴로움이 바로 번역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요.
고노스 타자가 없다면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타자를 수용하는 괴로움이 바로 번역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요.앙투안 베르망(Antoine Berman)이 쓴, 번역학의 금자탑과 같은 책의 번역판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타자라는 시련(L'epreuve de l'etranger)』(후지타 쇼이치역, 미스즈쇼보)이라는 책인데, 저는 책 제목을 보고 울었습니다(웃음). 그 책에 보면, 독일의 헤르더(J.G.Herder)는 ‘번역 따위는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요컨대 내셔널리즘인데요, 번역을 하면 타국어의 영향을 받아 언어가 오염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이 얼마 안가서는 마치 성적망상처럼 되어, “아직 다국어를 받아들인 적이 없는 융프라우와 같은 언어는, 종족이 다른 남자와 교제한 경험이 없는 처녀처럼, 아직 준비되지 않아서(충실과 확장이라는 번역의 개념이 있지요) 굳어지고 어색할지 모르지만, 청순 그 자체이다”라고 말하는 거의 처녀숭배 같은 문장이 되어버린 점이, 아주 스릴 있습니다(웃음). 헤르더는 타자가 있다는 것을 강렬하게 의식하기 때문에 봉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가메야마선생님이 말씀하신 ‘혼자 노래방에 가는’ 사람들은, 타자가 있다는 것 조차 의식하지 않는데, 그 부분이 곤란하지요.
가시마 그런 점은 외국어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T.S.엘리엇은 『독서론』에서 말합니다. 책을 읽고 그 안에 몰입하는 것은, 작자에게 자아를 점령당하는 것이다. 다른 독서 체험을 하면, 다시 점령 당한다. 그러한 것의 반복으로 여러 타자를 키워나간다. 그게 독서라는 것이지요. 요즘 사람들은 독서를 하지 않습니다. 외국어를 배우지 않지요. 그래서 점령당하는 일이 없습니다. 타인의 사고 방식과 치열하게 싸우고 고민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지요. 외국어를 번역하다보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단어 하나도 어렵습니다. 이런 느낌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실컷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점점 더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가메야마 마치 블로그처럼 되는 거군요.
고노스 ‘나의 융프라우’ 상태에서 쓰는 것과, 타자와의 알력을 경험한 후에 자성을 거쳐 쓰는 것과는 문장이 다르겠지요.
가시마 최근에는 외국문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번역자에게 일임해버리는 분위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스스로 원문을 읽는 일은 더 줄어들었지요. 대학의 외국문학계열 전공과정은 일제히 정원 미달 상태이고, 제2외국어를 폐지하는 곳도 늘었습니다. 언어를 배우면서 “바로 이웃의 언어인데, 이런 것이 있었구나”라는 놀라움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일본문학에 있어서도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2008년 3월7일, 도쿄 아카사카 일본국제교류기금에서)

 

「をちこち」제23호(JUN./JUL.'08)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