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고치 산책 (19)
<오치고치>는 일본국제교류기금(The Japan Foundation)이 격월로 출간하고 있는 일본 유일의 국제교류전문지로, 이번 호는 테사 모리스 스즈키씨의 수필을 전재합니다. 여러분의 애독을 기다립니다. |
(호주국립대학 교수)
졸업식, 입학식 시즌이 되면 국제문화회관 마당에는 빨간 양탄자가 깔린 긴 의자가 놓인다. 책을 보다 피곤해지면 도서실을 나와, 그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말차(抹茶)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웨이터에게 커피를 주문한다. 새싹이 힘차게 돋아난 나무들의 푸른 그늘이 드리워진 작은 가지를 봄바람이 흔들고 간다. 이 정원은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기복이 많은 땅에 나무를 절묘한 배치로 심어놓아, 계속 바라보고 있어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 피로한 눈이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국제문화회관은 도쿄 롯폰기에 있다. 롯폰기 교차로에서 가이엔히가시도오리(外苑東通り)를 이구라(飯倉) 방향으로 가다가 하얀 로아빌딩 다음에 좁은 길(도리이자카)로 우회전해서 3분 정도 걸어가는 곳에 위치한다. 하지만 롯폰기의 떠들석함이 이곳까지는 닿지 않는다. 좀 더 얘기하자면 도리이자카의 서쪽 옆길이 이모아라이자카(芋洗い坂)이고, 동쪽 옆길을 오타후쿠자카(於多福坂)라고 부른다. 지명에서도 에도시대의 자취가 짙게 남아있는 지역이다.
에도막부 말기 다도츠의 번주(多度津藩主), 교고쿠 이키노카미(京極壱岐守)의 에도 저택이었던 곳에 국제문화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키노카미의 에도 저택은 메이지 초기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후작 가문에 넘겨졌고 그 후에 구니노미야(久邇宮), 아카보시 데쓰마(赤星鉄馬),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弥太)로 소유주가 바뀌었다. 고준(香淳) 왕후는 여기에서 태어났다.
패전 후 국유지가 되었던 것을 불하 받아 국제문화회관이 세워졌다. 나처럼 일본근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이름들이 줄줄이 나온다. 역사는 단절을 거부하고 연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정원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으로 1930년에 조성된 것이다. 이와사키 고야타가 교토의 유명한 정원건축가인 ‘우에지(植治)’ 7대 오가와지헤(小川治兵衛)에게 의뢰하여 만든 것이라고 회관의 설명서에 나와있다. 모모야마시대와 에도시대 초기의 정원을 복원한 듯 하다.
봄에는 꽃구경, 여름 밤에는 더위를 식히고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눈을 감상한다.
변해가는 사계절에 꼭 맞게, 그리고 때로는 엄숙하게 정원이 호응을 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모든 계절에 정원을 즐길 수 있었다.
회관의 홀에서 결혼식이라도 있었는지, 마치 일요일에 교회에 갈 때처럼 차려입은 아이들이 잔디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정적은 깨졌지만 뛰노는 아이들이 풍경 속에 녹아 들어 전혀 싫지가 않다.
왕벚나무 꽃잎이 바람에 날려 커피 잔에 떨어진다. 꽃잎을 스푼으로 건져내고 나는 커피를 마신다.
「をちこち」제28호(Apr/Mayr,09)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