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 지 룡 (문화평론가)
하지만 아키하바라는 절대로 물건값이 싼 곳이 아니다. 오히려 비싼 편에 속한다. 전자제품을 저렴하게 구입하고 싶으면 전자제품 할인매장을 찾는 것이 좋다. 아키하바라가 전자제품 판매 거리로 유명한 것은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할인매장에 없는 첨단 제품을 사거나, 일반 상점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도청기나 투시카메라를 같은 불법 상품까지도 구할 수 있는 곳인 것이다.
최첨단 전자제품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아! 이런 물건도 있을 수 있구나'라고 저절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을 아키하바라에서 얻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전기, 전자제품 생산 능력이 별로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핸드폰이나 대형 평면 TV 등은 오히려 한국 것이 성능이나 디자인이 뛰어난 경우가 많아졌다.
신기한 물건을 아이쇼핑하는 재미를 주었던 아키하바라. 하지만 이제 이런 재미를 아키하바라에서 느끼기 힘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본에 갈 때마다 아키하바라에 들리는 이유는 아키하바라가 '오타쿠 문화'의 메카로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오타쿠'는 '마니아'를 지칭하는 일본용어다. 아키하바라에 모이는 오타쿠는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일요일 오후에 양손에 종이 봉투를 몇 개 들고 있는 안경을 낀 뚱뚱한 30대 남자를 만났다면 ‘오타쿠’라고 생각하면 된다. 매일 게임을 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기 때문에 눈이 나빠 안경을 끼고 운동 부족으로 뚱뚱한 경우가 많고, 세대적으로는 30대의 남자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나이가 30이 넘었는데도 아이들처럼 게임을 하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남자들. 우리 사회의 가치관으로는 '별 이상한 인간들도 다 있군'하면서 경멸하기 일쑤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대중문화의 강력한 경쟁력의 원천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 '오타쿠 문화'다.
'오타쿠(オタク)'는 원래 '당신(お宅)'에 해당하는 일본어의 2인칭 대명사지만, 현대적 의미로는 '이상한 것을 연구하는 사람, 별 것도 아닌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이란 뜻으로도 사용된다. 그 대상은 철도, 라면, 프로레슬링 등 광범위하게 존재하지만, 오타쿠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같은 영상물이다.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도 여전히 애니메이션으로 밤을 새우고 게임에 미쳐있는 오타쿠들. 이런 사람들이 1980년대 이후로 대거 등장했고 '오타쿠 문화'는 현대 일본의 젊은이 문화를 해독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청년들도 한 때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혁명에 미쳐있었다. 1950년대와 60년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운동은 급속히 막을 내렸다. 1980년대에는 이른바 '신인류'라는 젊은이들이 출현했다. 학생운동은 단결의 문화다. 젊은 사람들이 단결해 어른 사회와 싸우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인 신인류에게는 '단결'이라는 것이 새로운 구속으로 작용했다. '왜 내가 남들과 똑같아야 하지'라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우리 청년들'에서 벗어나 자기 개성을 주장하며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남과 다른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내거나 적어도 남들보다 빨리 유행에 동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남들보다 깊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당신(오타쿠) 이것 아세요?' '당신 이것 갖고 계세요?'라고 서로 질문했다. 그래서 '오타쿠(お宅)'족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오타쿠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흔히 말하는 '팬'과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게임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하루 종일 게임을 끼고 산다. 아침에 눈을 뜨면 게임을 시작해 몇 일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다. 게임이 없으면 한 시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직장이나 학교를 그만두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오타쿠일까. 아니다. 이런 사람은 '게임 중독자'다.
오타쿠도 어떤 대상을 열정적으로 좋아하지만 '광적인 팬'이나 '중독자'와 다른 점은 오타쿠는 좋아하는 대상을 연구한다는 점이다. 게임을 즐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게임의 성공과 실패 요인을 분석하고, 게임의 그래픽과 시나리오에 대해 비평을 가할 수 있어야 '오타쿠'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4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두터운 오타쿠 층은 대중문화의 안정적인 시장 구실을 하고 있다. 30대가 되어 강력한 구매력도 갖추게 된 오타쿠 세대는 새로 등장한 것을 제일 먼저 사주는 선도적 소비자로서, 그리고 대부분의 것을 구매하는 수집가로서 기능하며 일본 대중문화 시장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오타쿠 세대도 나이를 먹어간다. 그 중 상당수는 자식을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다. 요즘 아키하바라에서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게임CD를 사러 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시험삼아 게임을 해볼 수 있는 코너에서 자식들과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자주 볼 수 있다. 아이들보다 게임을 훨씬 잘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자신도 모르게 자식과 함께 놀면서 커뮤니케이션을 잘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힌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타쿠 세대들도 50대가 되고 60대가 되고 언젠가는 노년시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과연 그 때 그들은 여전히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어떤 것을 즐길 것인가. 나는 그런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즐거워서 일본에 갈 때마다 아키하바라에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