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동준 (한국일보 기자)
우리 가족은 1년간의 짧았던 일본생활을 통해 참으로 소중한 '보물' 두가지를 얻었다. 보물이라 해서 거창한 게 아니라, 일본인에겐 어느덧 생활이 된 듯한 '낫토'와 '온천욕'이다. 한국서도 낫토와 비슷한 청국장이 있고 온천도 흔하지만, 우리 가족의 경우 일본에서 그 진수를 맛봤으니 미련하다고 책망받아도 마땅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낫토와 온천은 우리 가족에게 건강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안겨줬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일본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시리즈의 주제인 '일본의 거기, 그사람'과는 다소 빗나간 듯도 하지만, 나에겐 낫토와 온천을 제외한 일본. 일본인은 생각할 수가 없을 듯하다.
나토와의 만남
사실 일본에 체류한 이상 낫토를 만난 건 필연이었다. 2003년 여름, 한때 각각 한국과 일본의 외무부(성) 출입기자로서 안면을 터왔던 고이시(小石)상을 센다이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마침 그는 NHK의 센다이 총국의 데스크로 전직해 왔고 나는 그곳의 도호쿠(東北)대학에 연수를 왔으니, 이런 인연이 없었다. 고이시상은 센다이 시내의 한 일식(和食)집에 들어서자 마자 다짜고짜 낫토를 주문했다. 이어 젓가락 끝으로 휘휘 젓는가 싶더니 게눈 감추듯 입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싱긋 웃더니 "이상, 도호쿠에선 낫토가 끝내준다네. 남쪽 지방보다는 훨씬 감칠맛이 나지요"라면서 장황하게 나름의 '낫토론'을 폈다.
사실 나는 낫토라는 다소 징그러운(?) 음식을 알고는 있었지만 감히 먹을 용기를 내지는 못한 터였다. 가공되지 않아 왠지 불결한 것 같았고 씹는 맛이 미끈미끈 한데다 가는 실같은 게 생기는 모양이 꼴불견이어서,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고이시상은 간사이(關西) 출신인 자신도 처음엔 생소했지만 금세 적응됐다면서 간장으로 간을 맞춰주며 강권했다.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대로 먹을 만했고, 뒷맛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청국장과는 다른 고소한 맛까지 느껴졌다.
고이시상과의 해후후 인근 편의점에서 낫토 5개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예상 밖의 대성공이었다. 아이들은 하나씩도 모자라 두깨씩 해치웠고, 아내도 입맛을 다셨다. 내친 김에 인근 대형할인점에서 10개 이상을 샀지만 이또한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동이 났다. 이후 낫토는 우리 가족의 식단에 빠지지 않는, 아니 빠질 수 없는 '필수 식량'이 됐다. 아이들은 젓가락 끝으로 가볍게 낫토의 가운뎃 부분을 허문 후 경쟁하듯 빠른 속도로 휘저으면서 끈적끈적한 점성을 내는 즐거움에 빠졌다. 특히 막내 홍이는 여기에 물에 씻은 김치를 몇점 얹어주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는 표정을 연출했다.
낫토를 먹은 후 달라진 건 가족 모두가 눈에 띄게 혈색이 밝아진 듯했고, 특히 변이 좋아졌다. 조금만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설사를 했던 막내 홍이는 쾌변의 기쁨을 만끽했고 덩달아 피부도 확연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낫토를 통해 확인된 홍이의 '변화'는 그야말로 경이였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같은 낫토의 놀라운 효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부드럽게 삶은 대두(콩)에 낫토균을 뿌려 약 40도의 온도로 발효시켜 만드는 낫토는 그야말로 우리 몸에 좋은 '효소 백화점'이었다. 낫토키나제, 아밀라제, 리파제, 카탈라제, 파오키시타제, 우레아제, 펙티나제, 셀라제...모두 100 종류가 넘는다. 이 가운데 카탈라제는 활성산소를 분해하고, 아밀라제와 프로테아제는 장(腸)속의 유해균을 잡아먹는 비피더스균을 증식시켜 장을 편안하게 만든다. 더욱이 낫토는 양질의 단백질을 듬뿍한 함유하고 있어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라나.
볏짚 속의 미생물과 콩에서 만들어지는 소박한 식품 낫토에 이같은 비밀이 숨어 있었다니,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낫토 사냥'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포기할 수 없는 과제였다. 두드리면 길은 열리는 법. 볏짚을 넣어 콩을 발효시키는 발효기로 직접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몸에 밴 낫토 식습관 덕택에 요즘 우리 집 식탁엔 바가지 가득 담긴 낫토가 빠지지 않고 오른다.
한편, 낫토와 청국장 간의 원조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둘 다 각각의 조상들의 지혜를 살렸을 뿐이고, 단지 일본은 먼저 상품화, 실용화했다는 느낌이다.
야사시이 오카미상
센다이는 참으로 복 받은 도시다. 자동차로 30분만 달리면 태평양에 이르고, 또 30분을 달리면 천혜의 산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산에는 어김없이 유서 깊은 온천이 있다. 우리 가족은 센다이에서 북쪽으로 100km가량 떨어진 나루코(鳴子) 온천에서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유황, 알카리 등 다양한 온천질과 끊이지 않는 수량으로도 유명했지만, 온천수 이상으로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진 여주인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즈키준코(鈴木俊子)상. 최신식 호텔에 비해선 다소 허름하고 왜소한 듯하지만, 서비스와 '여관정신' 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 온천여관 마츠다카(松高)의 오카미상이다. 우리 가족이 스즈키상을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여름 나루코 인근 공원에서 소나기를 만나 물에 빠진 생쥐처럼 이 여관을 찾으면서였다. 당초 온천욕을 할 계획은 없었으나 옷이 젖었으니 히가에리(침식은 하지 않고 온천욕만 하는 것)로 몸이나 녹이고 가자는 발걸음이었다. 아내는 아이들이 여름 감기에도 걸릴까 조바심을 태웠다.
이미 환갑을 넘긴 스즈키상은 이런 우리 가족을 너무나 밝은 웃음으로 맞아줬다. 그뿐이 아니다. 젖은 옷을 말려 줄테니 맘껏 온천욕을 즐기라고 권하지 않는가. 공짜가 없는 일본의 속성상 '추가 부담'을 요구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기우였다. 1시간 후 스즈키상은 남탕과 여탕을 오가면서 "옷이 다 말랐으니 내려오라고"고 알려왔다. 여기에 덤으로 따뜻한 차까지 내놓았고, 아이들에겐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감동 그 자체였다.
이후 스즈키상은 아이들에겐 다정스러운 할머니였고, 우리 부부엔 '일본어 교사'였다. 우리 가족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나루코를 찾았다. 거의 하루 종일 스즈키상의 여관에서 머문 적도 있었다. 여관 옆 공터는 어느새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스즈키상은 바쁜 와중에도 우리 부부와 사계절 느낌이 확연히 다른 나루코 협곡을 거닐며 '보통의 일본'을 이야기해줬다.
우리 가족이 나루코를 마지막으로 찾은 지난해 여름 스즈키상은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먼 친척 한 분과 단 둘이서 여관을 운영하긴 힘이 벅찬 듯했다. 하지만 그는 수십년 일궈온 여관을 죽는 날까지 포기하진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몸에 밴 친절과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씨, 여기에 화려한 요리솜씨까지...영락없는 고향의 어머니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 집 TV대 위에는 스즈키상이 선물한 나루코의 명산 '고케시' 한 쌍이 꿋꿋하게 서 있다. 일본의 자존심, 오카미상 스즈키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