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영일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 타무라 히로미상과 필자
일본 동북지방 히라이즈미(平泉)에 있는 모쓰지(毛越寺)의 쓰고도(常行堂)에서는 해마다 정월 20일이면 만다라 축제가 열린다. 긴 겨울밤의 마술 같은 함박눈이 온 산하를 덮어 설국을 이루면, 야제(夜祭)의 신화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신과 인간 사이를 정화시키는 밀회 속에서 탄생하게 된다. 인간과 신 사이의 매개 역할을 해주는 ‘몸’이 살아 움직이며 장엄한 장면을 이루어내는 연희, 그러한 연희는 전통 예능 속에서 더욱 돋보이기에 ‘살아 있음의 경험’을 강력하게 체험할 수 있다. ‘살아 있음의 경험’이란, 잃어버린 소년기의 순수함을 되찾는 길이며,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피폐해가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기에 이국의 전통예능을 찾는 여행을 통해 신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없애주는 ‘몸’과의 밀회를 나는 꿈꾸지 않을 수 없다.


이번의 모쓰지 여행에는 특히 나의 스승이신 모리시타(森下) 선생님과 오사카국립분라쿠극장의 기획가이신 타무라 히로미(田村ひろみ) 선생님이 함께 해 주셨다. 두 분은 이번 여행 뿐 아니라 일본의 전통예능 리서치에 언제나 함께 해 주신 고마우신 분들이다. 두 분의 선생님과 함께 JR을 타고 도착한 히라이즈미 역에서, 처음으로 나는 지방의 토속 음식인 앙꼬 소바를 접하게 되었다. 스무 개의 작은 그릇에 담겨있던 한 젓가락 분량의 소바. 하나, 둘 씩 그릇을 비우며 먹었던 달콤한 소바와 뜨끈한 국물 맛은, 아직도 나의 미각을 사로잡으며 신선함을 전해주고 있다.

 

모쓰지(毛越寺)는 일본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히라이즈미 문화를 꽃피운 후지와라 모토히라(藤原智平)가 조명한 유서 깊은 사찰로, 이곳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엔넨(延年)은 당대의 의식 문화를 대표하는 전통예능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엔넨이란 부처를 모시는 절을 칭송하고 천추만세를 축원하는 의식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종류의 예능이 동원된다. 동북지방의 이와테현(岩手県)은 ‘하야치네카구라(早池峰神樂)’인 시시마이(獅子舞)등 중요무형문화재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후지하라가가 100여년의 영화를 누렸던 곳이기도 하다. 후지와라가는 히라이즈미를 독점하며 중국을 통해 아시아 전역과 상거래를 벌여 부를 축적하게 되는데, 그들의 부는 모쓰지의 무량광원을 통해 황금 문화를 낳게 되었다.

 

모쓰지에 전승 되어온 엔넨은 사찰이 창건된 이래 해매다 열리는 행사로, 인명천황(仁明天皇)3년에 천태종의 시조 자각대사(慈覺大師)가 당나라에서 배워온 불법을 설파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쓰고도에서 행해진다. 현재, 일본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행사의 절차는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첫 번째는 한국의 절에서 행하는 식당 작법 같은 것으로 음식을 부처님께 공양하는 삼미공(三味供)이다. 두 번째는 불가의 설법을 낭송하는 수정 법회, 세 번째는 국가의 평화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엔넨이다. 오늘날에는 절차가 많이 간소해졌지만 과거에는 불당 뒤쪽의 만다라 앞에 음식을 봉양하고 소원을 빈 다음, 예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가무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전통예능이 이루어지는 쓰고도는 우리의 궁중 정재나 중국의 궁중 무용과 마찬가지로 열려있는 공간으로서, 꾸미지 않은 자연을 살아있는 무대로 사용한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우주 속에 표현해 낼 때, 열린 공간으로서의 자연은 상상력을 극대화 시킬 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정화시켜준다. 다시 말해 자연이 곧 최고의 무대인 것이다.

 

엔넨이 시작되기 전, 액을 때우기 위해 남녀의 군중들이 히라이즈미 역에서부터 횃불을 밝혀들고 행진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이 경내에 도착을 하면, 사십 명 정도의 남자들이 훈도시 만을 입은 채 벗은 모습으로 그들과 합류하는데, 추위 속에 붉어진 그들의 신체를 통해, ‘몸’을 헌납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사이를 맑게 하는 강력한 정화의 능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의 행진은 법당으로 까지 이어져, 법당에서는 마치 원숭이가 벽과 천장을 기어오르는 듯한 동작을 연출하는데, 이것은 곧 우리와 대상 사이에 ‘몸’이 살아 움직인다고 하는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함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퇴장을 하고 나면, 어린 자녀를 업은 부모들이 흰 무명 띠를 두르고 어린아이의 등에 귀신을 쫒는 가면을 씌워 승려 앞에 나와 자녀들의 무병장수를 축사 받는다. 그리고는  아이들과 함께 부처의 은덕이 가득하도록 기원을 한다. 이런 기원의 예절은 소설의 프롤로그처럼, 승려의 단아한 독경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행되는데, 인간의 기도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정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엔넨은 신을 부르는 짤막한 ‘요비다테(呼立)’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무대는 사방에 시메나와(注連縄)를 둘러 제사의 장소와 일반 관객 등의 자리를 구분하고 액막이 종이를 늘어뜨림으로써 신이 강림하는 자리를 신성하고 정결케 한다. 요비다테에 이어 한국의 농악 내지는 지신밟기와도 흡사한 덴가쿠(田楽)가 펼쳐지는데, 이는 풍년을 기원하고 악귀를 물리치는 의식 무용이라 할 수 있다. 덴가쿠의 백미는 가면 무용인 자쿠쇼(弱小)와 노죠(老女)의 대비에서 볼 수 있다. 젊은 애인의 춤인 ‘자쿠쇼’는 정숙하고 느리게 추는 춤으로 소리가 나지 않게 발을 굴러 내적 에너지를 분출시킨다. 이에 반해 늙은 여인의 춤인 ‘노죠’는 배경 음악 없이 오로지 힘찬 발 박자로만 음을 내는데, 구부러진 자세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는 마임은 자신의 모습을 부처 앞에 정성들여 바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력을 다하여 부처에게 기도의 춤을 봉양하는 노파의 춤을 통해, 간절하면서도 소박한 구도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의 고대인과 불교가 함께하는, ‘선’이 존재하는 엔넨은 오랜 세월 동안 향기로운 꽃을 피워 왔다. 그 향기를 맡으며, 전통은 역사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함께 흘러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해진 행사가 모두 끝나고 나면 야제의 하이라이트인 연회가 열리는데, 이때는 지방의 특산품으로 음식을 준비해 나누어 먹으며, 기쁨과 기원을 나눈다. 겨울 추위 속에서 엔넨을 관람하는 동안, 모리시타 선생님이 준비해 오신 방석 덕분에 주위 사람들의 많은 부러움을사기도 했는데, 선생님의 자상하신 배려에 늘 감사할 뿐이다. 

 

일본의 전통 예능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늘의 은하수가 땅에 내리 듯,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국에서의  엔넨은, 혼자만의 소중한 밀회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