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다 마사히코의「피안선생의 사랑」과 나츠메 소세키의「마음」
글 : 황호덕 (문학평론가, 일본 조사이국제대학교 교수)
“동물화요? 일본인은 이미 식물 인간이 된지 오래예요”
얼마 전 대담에 관한 일로 만난 도쿄의 한 편집자로부터 최근의 일본문학의 어떤 경향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비평서「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 대한 객담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당연히 누구랄 것도 없이 전후의 미국과 일본 문화를 소비와 쇼비니즘의 측면에서 파악한 모스크바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 코제브(Alexandre Kojeve)를 떠올렸다. 코제브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자면, 이미 욕망이 만족되어 버렸거나 그것에 완전히 묶여 버린 미국적인 소비 동물과 지켜야 할 것이 없는 데도 하나의 형식이나 포즈를 고수하기 위해 할복 자살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일본적 쇼비니즘이야말로 새로운 인류의 모습 혹은 징후라는 것이다. 이미 무의식이 의식 밖으로 해소되어버린 이러한 존재들에게는, 역사도 인간도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리라는 것―코제브의 글은 일본적 포스트 모더니티에 대한 글들에서 곧잘 인용되곤 하는 고전적 아포리아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신쵸(新潮)」의 편집장이기도 한 야노 유타카 씨 그의 농담 섞인 한 마디였다. “인간의 끝이고, 역사의 종언이고 뭐고 다 좋은데, 정말 이제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비판하기보다는 차라리, 동물화는커녕 식물화 되어버린 일본의 문화, 일본적 인간형들이 문제인게 아닐까”하는 이야기였다. 과연,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의 주인공들이나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들의 주인공들을 보면, 마치 식물의 잎사귀나 촉수처럼 한 자리에서 세계에 감응하고 있는 듯한 인간―아니 이미 식물처럼 느끼는 새로운 인간형들을 대면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인류도 인류이긴 하겠지만, 휴머니티 혹은 인간이라는 말에는 좀 더 복잡한 ‘역사’적 의미가 잠재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다소 시시하면서도 온당한 의문이 순리처럼 따라붙었다.
“펜으로 소설을 쓰기보다 몸으로 소설을 쓰는 편이 얼마나 더 즐거운가”
필시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는 그러한 희소해진 인간(성), 형식화된 삶 속에서 무너져 버리는 진실과 픽션의 경계를 그려내 온 대표적인 사례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인간은 없어져 버렸어”라거나, “거짓으로 뭉친 인생의 솔직한 고백” 자체가 픽션이라거나, 내가 쓰는 게 아니라 펜이 나를 쓰고, 몸이 글을 쓴다는 시마다식의 수상쩍고 의미심장한 단상들은 1980년대부터 진행되어온 일본의 포스트 모더니티 논의를 결정적으로 육체화한 소설적 시도처럼도 보인다. 예컨대 이제 이야기할 그의 소설「피안선생의 사랑」에 등장하는 이런 구절 “뉴욕에 있을 때의 나는 그야말로 개에 가까웠네. 동경에 돌아와서 인간으로 돌아왔지만, 동물보다는 식물에 가까운 인간이 되어 버린 거지. 식물 인간, 즉 영원한 방식 상태. 말도 하고 먹을 수도 있어. 걸을 수도 있고 섹스도 할 수 있어. 동경에서는 그런 식물 인간인거야. 방심 상태로 무언가를 오로지 기다리는 식물”.
그러니까, 어쩌면 코제브는 인간 이후의 인류 혹은 근대 이후의 존재들을 지칭하기 위해, 두 개 혹은 세 개의 비유를 사용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동물과 식물, 그리고 픽션. 그러니까,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 진행되는 시마다 마사히코의 소설「피안선생의 사랑」은 하나의 정물처럼 식물화해가는 일본인의 의식과 욕망이 한없이 풀린 채 동물화된 근대 이후의 삶을 저울질하면서 그 모든 인간성을 픽션으로 돌려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화와 식물화, 미국화와 일본화에 대한 저항 속에서 철저히 미쳐 가는 한 인간이 거기에 있다.「피안선생의 사랑」에서 묘사된 선생은 어떻게든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동물이 되었다가 식물이 되었다가, 결국 픽션에 귀의하고 마침내는 그 스스로 거짓말의 독에 빠진 무참한 ‘무’의 존재가 된다.
▲ 나츠메 소세키「마음」 |
중요한 것은 시마다가 인간성의 회복이나 사유의 복권 따위의 고리타분한 명제가 아니라, 근대적 인간, ‘일본인’, ‘일본문학’을 다시 묻는 일을 통해 인간과 소설 자체를 어떤 식으로든 끝까지 되물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성공적이든 어색한 것이든 어쨌든 그는 끝까지 가보려 하고 있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의 물음의 발길이 일본의 대문호이자 자기의식의 정수로 읽혀온 나츠메 소세키의「마음」을 패러디하는 일을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몸으로 바뀌고 펜은 페니스로 바뀌며, 자기본위의 고독은 숱한 여자들의 체액들에 둘러싸인 고독으로 대체된다. 그러면서도, 이 육체의 편력은 여전히 마음의 고독한 여정을 충실히 반복해 낸다.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마음」은 친구 K가 사랑했던 여자를 아내로 삼게 된 선생의 고뇌에 찬 삶의 비의(秘意)를 선생의 제자를 자임하는 ‘나’의 눈을 통해 그려낸 소설이다. 과연 전반부의 선생과 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와 후반부의 선생의 유서는 메이지의 초년과 장년기의 일본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런데, 자기본위라고 하는 근대적 자아의 비극을 그려낸 것으로 말해지는 소세키의「마음」을 사마다 마사히코는 몸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다시 시마다의 소설을 읽고「마음」을 다시 들춰본 사람이라면,「마음」의 초두가 선생 옆에 선 서양인의 육체를 통해 시작되었고, 그 육체에 대한 경외랄까 콤플렉스 없이는 이 소설의 실마리 자체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고독한 자의식의 존재인「마음」의 선생과는 반대로「피안선생의 사랑」에 등장하는 선생은 동서양의 백 명이 넘은 여자와 동침한 한량이자 색정광으로 그려지며, 소설을 통해 인생에 접근하는 인간이기보다는 소설을 통해 진실 밖으로 빠져나가는 하나의 거짓 자체처럼 보인다. “하반신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 펜을 들고, 펜이 허망하여 몸으로 소설을 쓰는 <페니스의 철학자>, <프로 거짓말쟁이>. 선생은 돈 후앙이나 사드, 겐지를 염두에 두지만, 그의 편력은 자기를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없애는 일에 가깝다. 완전한 픽션으로 남으려는 것이다.
픽션과 진실 사이를 허물어가는 몸으로 소설 쓰기는 물론 파산으로 끝난다. 왜냐하면 픽션이라는 것 자체가 현실의 존재를 가정한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기에, 현실을 버리고 픽션을 쓰는 일은 결국 픽션 자체의 가능성도 허물어버리는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생은 결국 픽션 그 자체가 되는 일에 실패하게 되며 소설의 결말은 동물들의 뉴욕도 아니고 식물들의 도쿄도 아닌, 다소 모호한 장소 티벳에서 막을 내린다.
“이미 인간은 없어져 버렸어. 그리고 픽션만이 남았네”.
시마다는 이 소설 안에서 독서를 겉읽기와 속읽기로 나누고 있는데, 그렇다고 할 때 그의 소설 자체가 현대 일본 문화와 그것을 형성해 온 소위 ‘고전’들에 대한 속읽기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시마다는「마음」을 필두로 하여「겐지 이야기」,「돈 후앙」, 사드와 같은 고전들의 ‘속’을 읽어나가며, 그것을 뒤집고 덧쓰는 일을 통해 하나의 소설을 구성해낸다. 그의 소설 속에서 일본과 일본이라는 거울에 비춰오는 문학사의 고전들은 다소 엉뚱한 방향을 향해 빛을 발하고 있다. 시마다는 그 고전들을 하나 하나씩 배치하는 일을 통해, 매번 그것들에 파산 선고를 내린다. 그럼에도 그 고전들은 그의 소설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대목들을 만들어 낸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미 이렇게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인간은 없어져 버렸어. 남은 것은 인간의 그림자뿐이야. 현실도 사라져버렸어. 그리고 픽션만이 남았네”.
그럼에도 이 몸으로 대체된 소설의 여정은 소세키의「마음」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 존재의 편력과 파산과 고독에 육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애초부터 시마다로서는 마음을 몸으로 뒤집는 일 따위보다는, 몸과 마음을 나누며 인간과 역사를 설정하는 그런 식의 세계상이 하나의 가설적인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피안선생은 마음의 흐름을 잡아나가면서 하나의 단단한 자기본위의 세계상이나 자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픽션에 의지해 모든 경계를 흐물흐물하고 몽롱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동물과 식물의 삶을 맛본 선생은 차라리 무(無)를 꿈꾼다. “펜으로 소설을 쓰기보다는 몸으로 소설을 쓰는 편이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거짓말쟁이 색광에 대한 걸 써봤자 조금도 재미가 없어. 그 자체가 되어버려야 해”
더 많은 섹스는 왜 선(禪)에 이르지 못하는가
코제브가 말한 동물들은 물론 실제 동물들이 아니라, 인간의 어떤 시대적 형태를 지칭하는 하나의 메타포였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헤겔이 말한 역사의 종언 이후의 인류의 모습이었다. 이 메타포는 따라서 당연히 ‘인간’이라는 개념 없이는 그 의미를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코제브가 말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피안선생이 말하는 현실과 픽션의 관계를 닮아 있다.
시마다 마사히코가 그려낸 피안선생의 몸의 편력이 철저히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선생이 픽션을 몸으로 쓰든 마음을 몸으로 뒤집든 어떻든 간에, 그 삶은 여전히 현실과 타자들이 지배하는 ‘관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시마다가 “관계의 미학”이라 부른 타자들을 향한 열림에 선생은 기꺼이 속박되어 있다. 선생이 섹스에 몰두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식물화된 혹은 동물화된 장소에서 타자와 맞대면하는 가장 농밀한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물론 섹스가 갖는 농밀한 열림으로 인해, 타자들은 언제나 타자‘들’이 아니라 하나의 절대적인 타자로서 나타난다. 더 많은 타자와 대면하기 위한 선생의 거짓말들은, 결국 모든 타자가 그 유일성을 드러내는 순간 파산하고 마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관계는 더 농밀한 것이 되거나 더 희미한 것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시마다로 대변되는 일본의 포스트모더니티,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알려준 것은 무엇일까. 픽션과 현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의 경계를 탈구축하는 소설적․사상적 시도들이 우리에게 요구해온 것은, 그러한 분할들 자체를 의심하고 완전히 허물어뜨리는 일 따위는 아니었다. 인간이든 현실이든 아무래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인간과 인간 아닌 것, 현실과 픽션이 분할되는 장소에 서서 그 사이의 관계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일, 아마 그것이야말로 탈근대를 말하는 이야기들이 요구한 태도와 윤리가 아니었을까. 차안에서 피안을 산다고 말하는 괴이쩍은 방법 없이, 차안도 무사하지 못하다. 관계를 잃으면 선 자리를 알 수 없게 되는 까닭이다.
시마다의 질문이 어떤 의미에서 픽션과 진실이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해묵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공리들과 수많은 고전들의 인용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가 헤맨 장소들은 여전히 하나의 “관계의 미학”들을 남겨 놓는다. 철지난 옛 추억을 더듬는 산보 따위가 결코 아니다. 시마다가 헤맨 장소들을 따라가는 일이란, 일본문학, 일본인, 혹은 우리들 자신이 헤맨 곳을 다시 걸어보는 일이 될 것이며, 우리는 이 포스트모던한 입구에서 일본의 고전과 지난 세기의 편력들과 좀더 허물없이 몸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