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달라도 만국의 소설가끼리는 공유
정이현(이하 정) 반갑습니다. 이토야마 선생의 22일 저녁 강연 진행을 제가 맡아서 직접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아마도 그 자리에서 제가 제일 재미있게 들은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청중들 반응도 좋았습니다만. 아무래도 그 자리에서 소설 창작하는 사람은 저뿐이었을 테니까요. 강연을 들으면서, 아무리 언어가 달라도 만국의 소설가들끼리만 공유하는 게 있구나, 싶은 생각으로 저 혼자 웃은 대목도 있고 감동 받은 대목도 있었습니다.
이토야마 아키코(이하 이) 저 자신도 그 자리에 일반인뿐만 아니라 정 선생 같은 소설가도 있어서 긴장이 많이 됐습니다. 정 선생이 제 얘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강연이 끝나고 나서 물어보고 싶었지요.
정 강연에서 이토야마 선생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요소로 작가, 현실, 상상, 수수께끼 네 가지를 들어 설명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로서는 평소에 막연하게만 생각해 오던 거였는데, 네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얘기를 하는 걸 들으니 분명하게 다가오더군요. 특히 ‘수수께끼’부분이 그러했습니다.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어떤 물질이 홀연히 다가와서 작가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 있다는 거죠. 저 역시 지금도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순간을 잘 기다리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어느 순간 어떤 물질이 홀연히 다가와서 작가에게 말 거는 순간
이 어제 강연에서 말한 내용 자체가 사실은 그 수수께끼의 세계에서 온 것이죠. 작년 6월 30일에 후쿠오카에서 그 네 가지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도형이 떠올랐는지 잘 모르겠어요.
정 그게 바로 수수께끼 아닐까요.(웃음)
이 저 자신도 그런 도식을 늘 검증하면서 소설을 쓰는 셈입니다. 아직 현실 부분이 부족한 것 아닌가, 또는 수수께끼 부분이 좀 더 작용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하죠. 지금 쓰는 소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 저도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몇 퍼센트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보면, 어느 한 부분이 부족하면 남들이 뭐라 평가하기 전에 저부터가 무언가 흡족하지 않고 찜찜한 느낌이 듭니다.
인쇄된 순간부터 독자의 것…독자는 부동표
이 솔직히 남의 평가는 그리 믿을 만한 게 못 되죠. 편집자말고 일반 독자의 평은 각기 다르거든요. 물론 그게 좋은 거라 생각합니다.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좋아하는 부분과 싫어하는 부분이 사람마다 다르죠. 저는 개인적으로 독자란 부동표라고 생각하는데, 정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 선생 소설이라면 무조건 사 보는 고정 팬들이 있으신가요?
정 당연히, 모든 독자가 다 부동표라고 생각해요. 저는 늘 하나의 텍스트를 100명이 읽으면 100개의 텍스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기까지 오래 걸렸지요. 초기에는 저 독자는 왜 내 의도를 오해할까, 가서 설명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세상에 던져진 소설은 내 몫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분들에게 달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고정 팬이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달콤한 나의 도시>가 베스트셀러가 되긴 했지만, 그게 ‘정이현의 작품’이어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달콤한 나의 도시>라는 소설이어서라고 생각하죠. 제 등단작에 대해서도 호오가 갈렸어요. 재미있는 건, 그 작품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들이 다른 작품에 대해서는 좋다는 반응을 보였고, 드물게 그 작품을 정말 좋아했던 분은 다음 작품에 대해 오히려 불만스러워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내 공 치지 않고 방망이로 내 얼굴 치는 느낌 받을 때 있어
이 공감합니다. 소설이란 인쇄된 순간부터 독자의 것이죠. 기회 있을 때마다 독자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미 써 버린 것에 대해서는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해요. 늘 다음을 생각하죠. 가령 제 소설 <사랑 따윈 필요없어>는 평가가 크게 둘로 갈린 작품이에요. 아예 생리적으로 싫다며 완전히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평도 있죠. 그러나 이미 던져진 공에 대해서는 독자가 어떻게 방망이를 칠지 알 수 없는 거죠. 삼진아웃이 될지 큰 안타를 칠지. 책이란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착한 사람은 실제로 쓰여진 것 이상으로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못된 사람은 반대죠. 비평을 읽을 때, 내 공을 치지 않고 방망이로 내 얼굴을 치는 것 같은 느낌 받을 때가 있어요.
정 독자와 소통 놓치지 않으면서 제 길을 가는 게 어렵지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도 요즘 그런 점을 실감합니다.
이 예를 들어 디테일도 독자와 커뮤니케이션 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음악, 영화, 옷, 음식 같은 걸 작품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되죠. 틀린 툴을 사용하면 그에 대한 반응이 오는 거죠.
정 강연에서도 작가인 나와 개인인 나 사이의 갈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개인으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 사이에 갈등이 있지는 않으신가요?
이 물론,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작은 소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지역신문에 제 얼굴이 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다 알기 때문에, 밥집 가도 술집 가도 “아쿠타가와상 축하해”하는 식의 반응을 듣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호적인 반응이 많다는 거죠. 그런 건 작가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마다 각기 내부적 금기가 있어…작가와 인물 사이 ‘거리’ 모색
정 저 역시 옷 사러 갔는데 저인 걸 알아보거나, 환전소 직원이 제 책을 읽었다면서 사인해 달라는 경우를 만나면 당황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작가로서의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 사이에 갭이 큰 사람인 것 같아요. 이번에는 터부에 대해 말해 보죠. 제 생각에는 동성애나 근친애 같은 외부적 금기보다는 작가마다 각기 다른, 내부적 금기가 있는 것 같아요. 제 경우는 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굉장히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남 보기에 무난하게 성장했죠.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그게 콤플렉스가 되는 것 같았어요. 내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사적인 일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과연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내가 문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죠.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실린 단편들에서는 의도적으로 내 얘기를 안 하려고, 배제하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그때는 작가란 자기 얘기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널린 이야기를 채집해서 맛깔나게 재구성해서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냉정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인물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저 위에서 인물들을 내려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소설집을 낸 뒤 그에 관한 비평과 담론을 보면서 오히려 저 개인적으로는 진공 상태가 왔어요. 한 시대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문예지의 청탁을 받고도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어요. 과연 무슨 얘기를 써야 할까, 소설이란 걸 또 쓸 수 있을까, 인물들에 대해 계속 냉정한 거리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죠. 그러다가 <타인의 고독>이라는 단편을 쓰면서 비로소 내 이야기를 녹여내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혼남이에요. 나와는 다른 주인공을 세웠지만, 오히려 그를 통해 정말로 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죠. 내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가 겪은 걸 똑같이 쓰는 게 아니구나 하는 걸 그 작품을 쓰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내가 정말 고독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타인들은 얼마나 고독할까, 내가 정말 그들의 고독을 알 수 있을까, 남들은 나의 고독을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편 <삼풍백화점>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그 작품으로 현대문학상을 받았는데, 개인적인 이야기를 독백하듯 쓴 것을 남들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그것이 내 소설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졌다면, 지금은 변화의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작가와 인물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모색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저는 갈 길이 먼 젊은 작가라서 작가인 나와 개인인 나의 관계도 앞으로 변할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 소설을 못 쓰게 되면 어쩌나 하는 공포
이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문학을 하는 이들은 나와 다른 타입의 사람이고, 나는 문학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쩌다 소설을 쓰고 나니까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깜짝 놀랐어요. <타인의 고독>은 아주 좋은 제목이네요.
꼭 읽어 보고 싶어요. 제 소설 <바다에서 기다리다>의 주인공인 후토짱의 경우에도 분명히 모델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에는 실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죠.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소설에 등장할 때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가 거의 매일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내일부터 소설을 못 쓰게 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가 그것입니다. 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은 실제로 소설을 쓰는 순간뿐이에요.
정 다음에 제가 하려던 질문과 너무 똑같은 말씀을 하셔서 놀랐어요. 저 역시 의도했던 건 아닌데,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첫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를 신문에 연재하고 작년 7월에 책으로 냈습니다. 책 내고 나서 언론 인터뷰까지 다 끝나고 나니까 문득 텅 비어 버린 느낌, 내 안이 고갈된 느낌이 들더군요. 내가 정말 소설을 더 쓸 수 있을까 두려워졌어요. 그래서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어 보자 하는 생각에 몇 달 동안 단 한 줄도 안 쓰고 보냈습니다. 습작기 이후 처음으로 맛본 긴 휴식기였죠. 지금은 거기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기간이에요. 처음 고갈된 느낌이 왔을 때는,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고, 소설가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소설을 안 쓰는 동안 소설에 대한 그리움이 생겼다는 것이에요. 내가 얼마나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인지, 소설과 내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새삼 깨닫게 됐죠.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뒤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내가 영원히 소설을 써야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최근 몇 개월 동안 했습니다. 다음에는 정말 좋은 소설 써야겠구나, 나 자신을 갱신해야 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러던 어느 순간 다음 장편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제 모든 촉수가 거기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소설을 안 쓰는 동안 소설에 대한 그리움 생겨
이 저는 체질상 그렇게 여유가 있지 못해요. 일본에서는 가난증이라고 합니다. 한때 일 없이 근근이 먹고살았던 시기가 있어서 가난을 겪는 게 사실 두렵습니다. 지금까지는 단편을 많이 썼죠. 일을 안 하면, 일을 안 한다는 게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단편도 좋고 장편도 좋은데, 가능하면 소설 세 개 정도를 동시에 다루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울증 있는데, 조 상태에서 쓰러지거나 울 상태에서 쓰러지거나 둘 중 하나예요. 그래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쓴다는 말씀을 들으니 부럽네요.
정 저 역시 처음으로 맛본 휴식이었어요. 꼭 여유를 부리고자 해서 부린 게 아니라 저절로 다가온 전환점이었던 셈이죠. 그렇게 쉬는 동안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재미있는 게, 어떤 나라에 가든 대도시에 가면 사는 모습이 너무 똑같아서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 특히 택시를 타면 택시 기사들의 모습이 똑같더라구요. 제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면 여러 나라 대도시의 택시 기사들을 찍어 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의사소통 하고 취직 못할까봐 걱정하고, 기회가 되면 진정한 사랑을 찾겠다며 두리번거리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서울에 사는 서른 살 된 남자와 도쿄의 서른 살짜리 여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매우 비슷할 것 같습니다. 그게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토야마 선생의 소설과 2007년의 일본, 또는 세계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2007년의 일본과 세계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시는지요?
사회 영향 받지는 사람이 소설 안에만 등장하는 건 이상한 일
이
정 이토야마 선생의 소설은 사소한 일상을 다루지만, 제가 잘 모르는 현대의 모습이 확 다가오는 느낌을 줍니다. 특히 단편들이 그런데요. ‘정말 현실’이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가공된 현실이 아닌 ‘정말 현실’의 느낌이 있어서 좋아요.
이 문득 생각났는데, 왜 현실이 필요한 것일까요? 사람에게 절실한 것과 현실이란 동전의 앞뒷면, 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것 같아요. 바로 그런 절실한 것을 그리는 게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작가로서 미세한 끈 같은 도시인의 관계 그리고 싶어
정 그렇게 삼각형이 그려지는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선생의 소설 <바다에서 기다리다 >를 보면 죽은 후토짱의 하드디스크를 친구인 ‘나’가 긁어 없애는 부분이 나오죠. 생전의 후토짱의 부탁으로 말이죠. 정말 부끄럽고 은밀한 게 그 하드디스크 안에 들어 있다는 건 현실의 일이기는 한데, 소설에서 그렇게 그려지니까 새롭게 다가왔어요.
동료애랄까 우정이랄까, 아무튼 끈끈한 관계를 맺으면서 상대방의 하드디스크를 감춰주려 하는 것, 이게 바로 현대인들 사이의 의리랄까 진실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현대의 고독한 개인들끼리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는가,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치유하기도 하고, 후토짱은 죽지만 남은 사람은 살아가고, 그런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이토야마 선생 나름의 방식으로, 2007년의 일본이든 세계든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라고 봅니다. 서로의 하드디스크를 폐기해 주는 것 말이죠. 독자로서 저도 공감했어요. 저 역시 작가로서 미세한 끈 같은 도시인의 관계를 그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데뷔 시기도 비슷하고 과정도 그렇고, 여러 모로 비슷한 고민을 하며 같은 길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취재와 검증 철저히…소설을 쓰다 보면 가끔 기가 턱턱 막혀
이 정 선생의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으면서 굉장히 사실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그렇게까지 쓸 수는 없다는 기분이었어요. 가령 애인이 자신의 팬티를 벗길 때 엉덩이를 들면 안 된다는 ‘십계명’의 한 대목 같은 게 그래요. 제가 <바다에서 기다리다>를 쓸 때도, 정말로 하드디스크의 데이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는가에 관해 여러 가지로 자문을 구했습니다. 마침 주변에 피시를 버리려는 사람이 있어서 실제로 소설에서처럼 긁어 보기까지 했죠. 취재와 검증을 철저히 하는 편인데, 정 선생은 어떠신지요?
정 정말이지 소설가란 최후의 수공업자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쓰다 보면 가끔 기가 턱턱 막히죠. 말씀하신 것처럼, 만일 하드디스크란 게 폐기되지 않는 거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 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십계명’은 일부러 궁서체로 썼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급훈이나 가훈처럼 계몽적인 내용을 담을 때 궁서체를 쓰죠. 그런데 그 십계명은 제가 실제로 언젠가 여성잡지에서 본 내용을 소설에 맞추어서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주인공 유리는 궁서체의 세계에 어떻게 진입하려 하는가, 그러나 어떻게 뒤통수를 맞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죠. 십계명과, 말씀하신 엉덩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독자들한테서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십계명을 소설에 쓰면서도 하나하나 일일이 고민하고 꼼꼼하게 조사도 했어요. 제 장편소설에서 남자 인물이 가출해서 신분을 속이고 산다는 설정이 나옵니다. 그걸 쓸 때도 한국에서 정말 신분을 속이고 살 수 있는지, 가출 신고를 하면 누구에게 연락이 가는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도 가출 신고를 할 수 있는지 하는 대목에서 걸리더라구요. 어찌 보면 단순한 건데도 경험이 없으니까 막힌 거죠. 결국 경찰서에 전화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처음에 전화를 받은 여자 경찰관은 ‘누가 가출했냐’며 딱딱하게 대하더군요. 결국 다른 경찰서에 전화해서, 소설 취재를 위해서라고 이실직고했더니 친절하게 설명해 주더군요. 소설을 쓴다고 하면 일반인들이 기꺼이 협조해 준다는 걸 새삼 알았습니다. 평소에도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든 소설 쓰는 데 도움을 주려 하는 게 인상적이에요. 지금은 다음 장편 때문에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 인터뷰하고 있는데, 주변 친구들에게 소설 취재 대상을 구해 달라면 기쁘게 응합니다. 리얼리티가 떨어지면 소설이 안 되지 않습니까? 조폭으로 살아온 사람을 알게 됐는데, 한번 써봐 하며 연락하는 경우도 있어요.
영화는 경쟁자도 아니지만 파트너도 아니다
정 강연회에서도 이토야마 선생의 작품이 영화로 제작된 데 대한 얘기가 나왔죠. 저로서는 영화를 단 한번도 경쟁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영화도 보고 책도 읽습니다. 영화에서 감동을 얻기도 하고, 책에서 그렇기도 하죠. 양쪽에서 얻은 감동은 내 안에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파트너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영상은 영상의 세계가 있고, 저는 문자로 표현하는 사람이죠. 밖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경쟁이니 협력이니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제 술자리에서, 일본 소설에 비해 일본 영화는 왜 한국에서 인기 없나 하는 얘기를 이토야마 선생과 나누었습니다. 일본 영화에는 산사의 풍경이 흔들리는 장면이 삽입돼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처럼 쉼표나 여백의 노릇을 하는데, 한국인들의 정서는 그와 다른 것 같다고 이토야마 선생이 말했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읽는 이가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쉴 공간을 찾고 그 사이에서 상상을 하게 하는 문학 말입니다. 제 생각에 좋은 영화와 좋은 문학은 어떤 지점에서 만나는 것 같습니다. 경쟁도 아니고 협력도 아니죠.
이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영상은 영상대로, 문학은 문학대로, 각자의 방식이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을 수도 있는데, 그것이 어떨 때는 플러스가 되고 어떨 때는 마이너스가 되기도 합니다. 제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 대해서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주변 친구들은 요란하게 축하 인사를 하지만, 그렇게 기쁘지도 않습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소설에서 이미 충분히 얘기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학만이 할 수 있는 몫이라면 역시 문장의 힘
이 제가 사실은 아직 작가지망생이던 2001년에 ‘천재선언’을 했어요. 내가 실제로 천재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였죠. ‘그래? 내가 못할 것 같아?’ 하는 심사에서였습니다. 아직 소설을 쓰기도 전에 말이죠.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독자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잠재의식 안에서 무언가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 하나하나의 잠재의식 안 무언가 작용하도록 하는 것
정
이 강연회에서는 한국 독자들을 많이 만나게 돼서 사실 긴장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한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이 마음에 들고, 기회가 있다면 다시 오고 싶습니다.
정 제가 관객으로서 보기에는 긴장하기는커녕 너무나 여유 있고 유머러스한, 멋진 강연이었어요. 독자들이 이토야마 선생의 소설을 다 읽고 온 게 놀라웠습니다. 한국이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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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2년 제1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에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을, 2006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2003)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2006)를 펴냈다.
이토야마 아키코
196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기업에 입사해 일하다가 2001년 퇴직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03년, 우울증에 걸린 여성이 주인공인 <잇츠 온리 토크>로 제96회 ‘문학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2004년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로 제30회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3회 연속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르다가 마침내 2006년 <바다에서 기다리다>로 제134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한국어로 번역된 <바다에서 기다리다>와 <바다의 선인>을 비롯해 <스몰토크> <바보들이 도망간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