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제교류기금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는 <JF 펠로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분들의 진솔한 일본체류이야기와 일본연구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음식의 장소성

  

 

장원호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사회학과 교수

 

내가 국제교류기금의 도움으로 일본 게이오 대학에 가게 된 것은 2004 8월이었다. 그 후로 1년 동안 게이오 대학 외국인 아파트가 있는 아자부쥬방(麻布十番)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 생활은 그 전의 일본생활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가져다 주었다. 아자부쥬방은 일본의 오래된 고급 주택지역이고 주위에 한국대사관을 비롯한 많은 외국 공관들이 있다. 또 동경의 새로운 명물인 록본기 힐즈가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자부쥬방은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울린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난 아자뷰주방에 살면서 록본기 힐즈로 산책하거나 영화보러 가면서 마치 록본기 힐즈를 집앞의 놀이터 비슷하게 사용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또 가끔가다 큰 맘 먹고 록본기 힐즈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도 했는데, 특히 쿠시노보()라는 쿠시(꼬치)카츠 레스토랑에서의 고급 꼬치 요리는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였다 

 

아자부쥬방 상가 거리는 동경에서 가장 걷고 싶은 거리의 하나로 뽑힐 정도로 맛있고 역사가 깊은 음식점이 많다. 특히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소바집, 사라시나호리이(更科堀井)의 소바는 비록 가격이 비싸긴 했지만, 깊고 섬세한 소바의 맛을 알게 해 주었다. 또 아자부쥬방에는 맛있는 파스타 점이 많이 있었는데, 아내는 요즘도 거기서 먹은 파스타와 한국의 파스타를 비교하곤 한다. 이러한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의 기억은 아자부쥬방을 떠올릴 때 내 마음을 따듯하고 풍요롭게 해준다.

 

 

 

하지만, 아자부 쥬방의 음식이 다 비싼 것은 아니다. 우리 아파트에서 10미터도 안 떨어져 있는 꼬치집(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인터넷으로도 확인할 수 없지만)은 비록 가격은 록본기힐즈 쿠시카츠 레스토랑의 반도 안되지만, 그 맛은 절대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집 근처의 라면집, 아자부 라멘은 아자부쥬방을 기억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아자부 라멘의 가격은 600. 점심에는 밥을 서비스로 준다. 그리고 라면과 함께 매운 숙주나물을 맘대로 먹을 수 있는데, 밥 위에 얹어서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아자부 라멘은 기본적으로 돈코츠(돼지뼈) 스프인데, 아주 진하지는 않다. 면은 좀 굵은 편이지만 쫄깃쫄깃하다. 돼지고기(챠슈)는 전혀 냄새가 없고 아주 부드럽다. 난 아마 아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최소한 하루에 한번은 아자부 라면을 먹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내가 한국에 잠깐 가 있을 동안 하루 세끼 전부 아자부 라멘을 먹은 적도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충격적인 얘기를 하나 더 보태보자. 아자부쥬방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와서도 나는 한동안 아자부 라멘 맛을 못 잊고 그리워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학회 발표를 위해 동경에 출장 갈 일이 생겼다. 출장 가기 전부터 나는 곧 아자부 라멘을 먹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잔뜩 기대가 부풀어 있었고 결국 아자부 라멘을 먹있다. 그런데, 그 값이 600엔이 아니라 아마 8600엔쯤 들었던 것 같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일본에 출장 온 첫날, 일본의 대학교수들과 저녁을 먹고 간단히 2차를 하고 신주쿠에 있는 호텔로 돌아온 것이 밤 12시가 넘어서였다. 라멘 매니아들이 항상 그렇듯이 술 먹은 다음에는 꼭 라면이 먹고 싶어진다. 12시가 넘어서 아자부로 가는 대중교통은 다 끊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아자부 라멘의 유혹은 오히려 점점 더 강렬해졌다. 결국, 내 선택은 신주꾸에서 4000엔 넘게 지불하여 택시로 아자부쥬방에 가서 600엔 짜리 라면을 먹고 또 4000엔 넘게 택시비를 내고 신주쿠 호텔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물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는 약간의 후회도 했지만, 그날 밤의 아자부 라멘은 특히 더 맛있었다.

 

 

도시사회학자로서 나는 장소성에 관심이 많다. ,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도시 내의 역사적 스토리텔링 그리고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공간으로서의 장소이다. 이러한 장소성은 도시를 경험과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 나에게 아자부쥬방은 특별한 기억과 경험의 장소이다. 일상의 바쁜 연구와 교육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책을 보며 사색하던 장소. 고급 주택가와 전통 있는 요리점이 초현대식 건물과 공존하는 장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자부 라멘으로 대변되는 잊지 못할 음식의 장소이다. 그러한 기억의 장소는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 현재에도 아자부 쥬방에만 가면 나는 아자부 쥬방에서의 여유로웠던 느낌들, 다양한 식당들이 제공한 맛있는 음식으로 인한 행복한 느낌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여유롭고 행복한 느낌이 나의 일본 생활전체에 대한 기억과 인상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음식의 장소성은 중요한 사회학적 주제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