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제교류기금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는 <JF 펠로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분들의 진솔한 일본체류이야기와 일본연구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강형기
충북대학교 교수
발전한 나라의 감동적인 이야기, 그곳을 가꾸고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인류의 문화재다. 나는인류의 문화재를 보고 그것을 한국에 전하려고 일본의 여러 지방을 다녔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준비한 만큼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지낸 나의 흔적을 보면 내 전공이 지방자치와 행정학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일본의 도시와 농촌을 걸으며, 경관이 풍경으로 바뀌고 그것이 천년의 風土로 승화되어 온 과정을 보고 싶었다. 사람이 걸으면 길이 되고, 그 길은 세월 따라 문화가 된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 산다는 것은 감동하는 것. 나는 사랑하고 배우며 감동하는 삶을 살아 온 지도자들의 발자치를 더듬어 보고 싶었다. 그러한 나에게 일본의 토지는 그 모두가 거대한 역사와 지혜의 보물창고였다. 특히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인간군상을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깨우치는 길이었다.
고료카쿠(五稜郭)에 서면 히지카타 토시죠(土方歲三)가 최후의 결전에서 가슴에 품었을 의리가 보이는 듯 했고, 반군대장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가 자신을 토벌하러 온 구로다기요타카(黑田淸隆)에게『海律全書』를 전해주었던 그 조국애를 통해 日本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로가 된 에노모토의 구명을 위해 제일 먼저 나섰던 토벌대장 구로다의 도량과 대의의 정치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고치켄(高知縣)의 가쓰라하마(桂浜)에서는 에노모토의 뜻 품은 영웅의 그림자를 느끼려 했고, 야마구치(山口)에 가서는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의 간풍고로쿠(感奮語錄)을 접할 수 있었다.
학교 선생인 나는 오래 전부터 요시다를 흠모하고 있었고, 요시다의 흉내를 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 만든 모임이 청년목민관회(靑牧會)다. 당선 당시의 나이가 50세 미만인 전국의 시장․군수․구청장들이 두 달에 한 번씩 1박 2일간 모여서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고 내가 고문 겸 지도교수가 된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수장 9명으로 시작한 청목회는 7년이 지나면서 회원이 40여명으로 늘어났고, 청목회 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현재 5명이다. 2006년 내가 국제교류기금의 프로그램에 따라 일본에 가 있을 때 청목회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이 3차례에 걸쳐 일본시찰을 했던 것도 지도교수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일본에 온 청목회 멤버들이 松下政經塾(The Matsushita Institute of Government and Management) 에서 강의를 듣게 하고, 일본의 지역리더들과 교류하게 했다. 그 때 만난 대표적인 사람이 지금 일본 정부에서 대신과 장관으로 일하고 있는 가타야마 요시히로(片山善博) 당시 돗토리켄(鳥取縣) 지사와 후쿠시마 히로히코(福嶋浩彦) 아비코시(我孫子市) 시장이었다.
요시다 선생은 일본의 큰 지도자를 배출했지만 나는 시골의 작은 리더들과 공부를 하고 있다. 나의 그릇 만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후, 전국에서 적극적인 의욕을 가진 공무원을 매년 100명씩 선발하여 매월 첫째 금요일과 토요일에 걸쳐 공부하는 향부숙(鄕富塾)을 개설했다. 향부숙 숙생들을 인솔하여 매년 1차례씩 일본 시찰을 하는 것도 큰 기쁨며, 이제 향부숙은 나의 가장 중요한 브랜드가 되었다.
일본 오카야마 지역의 도시경관에 관한 시찰을 한 향부숙생들의 모습 |
내가 일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 한 부분은 일본의 시골지도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한 나에게는 가문에서 전래하는 공부방법이 있었다. 1938년, 오카야마켄(岡山縣) 아키이와군(赤磐郡) 고요무라(高陽村)에 체류하면서 일본을 시찰하고, 매일같이 그날 만난 사람과 느낌을 기록한 선친의 유학일지가 바로 나의 연구 지침서다. 나는 가미카쓰쵸(上勝町), 도가무라(利賀村), 나오시마(直島), 분고다카다시(豊後高田市) 등 많은 시골을 찾아다녔고, 참으로 좋은 친구를 만났으며, 지금은 협동하고 공생하는 그들의 모습을 한국에 전하고 있다. 책을 출간했고, 신문에 고정칼럼을 쓰며, 매년 2만여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일본을 잘 모른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일본전문가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본의 친구들이 보내 온 책을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