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제교류기금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는 <JF 펠로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분들의 진솔한 일본체류이야기와 일본연구이야기를 담았습니다. |
이유진
숙명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필자는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지원으로 2008년 여름부터 약 1년간 동경에 체류하였다. 1987년, 역시 국제교류기금 덕분에 일본에서 학위논문을 준비했던 이래 20여 년만의 일본생활이었다. 1980년대 말은 일본의 버블경제가 최절정에 달했던 시절. 당시 일본은 세계시장을 제패한 경제대국으로, 전세계에서 일본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필자에게는 일본의 모든 것이 새롭고 경이로웠으며, 그 화려함과 풍요로움에 크게 인상을 받았었다. 그러나 2008년의 동경에는 그때 그 시절이 문자 그대로 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잃어버린 20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한 일본인 친구는 버블경제 당시를‘그야말로 꿈만 같았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일본이 한 세기 이상 축적해 놓은 부와 역량, 사회문화적 자산의 깊이와 폭은 지금도 여전히 대단하다고 느꼈다. 또 오늘날 일본은 급격히 변화하는 내외환경에 직면하여 기로에 서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일본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자의 연구주제였던 일본의 외국인정책, 다문화정책이다. 일본에는 1980년대부터 뉴커머 외국인이 급증하여 현재 외국인주민 수가 200만 명이 넘는다.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일본의 산업이 유지되기 힘든 구조이다. 특히 이들이 집중 거주하는 지역은 다민족사회화 하고, 외국인과 일본인 주민의 갈등이 빈발하였다. 이에 더해 소자고령화로 인해 향후 일본경제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민국가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으나, 일본의 지도자들은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외국인 방문교수로서 케이오대학의 신세를 톡톡히 졌다. 이 지면을 빌어 케이오 행을 스폰서해준 법학부의 소에야 요시히데 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담한 미타 캠퍼스는 그 옛날 학창시절 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 없는 모습이 오히려 친근해서 좋았다. 연구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여유롭게 책을 보면서 지낸 시간은 연구자로서의 최대의 사치가 아닐 수 없다. 가끔은 국제교류기금에서 주최하는 펠로우 특강에 참석하여, 흥미로운 발표를 듣는 것도 즐거웠다.
학계에서 맹활약 중인 연구자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았던 것은 금상첨화였다. 메이지대학의 야마와키 케이조교수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최근 일본의 다문화공생 논의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으며, 행정당국에 많은 정책조언을 하고 있다. 야마와키교수를 통해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재일한국인 등 일본 내 소수민족 문제 전문가인 케이오대학의 카시와자키 치카코교수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시민권 문제의 권위자인 메이조대학의 콘도 아츠시교수와도 가끔 만나서 매우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 교수의 세미나에도 참석하여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을 부담 없이 만끽해보았다.
은행나무 단풍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계절, 그 이름도 계절에 어울리는 이쵸단지(いちょう団地) 다문화 마츠리도 참관하였다. 요코하마시 이쵸단지는 외국인주민의 비율이 매우 높은 커뮤니티이다. 마츠리에서는 중국, 베트남 등의 민속 공연, 일본인과 외국인 주민이 어울리는 놀이마당, 외국인 청소년 리더들의 방재시범 등을 참관하고 각종 민족음식을 맛봤다. 일본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이제는 지역에 따라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 다문화사회의 경험 속에서 상호인정과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외국인집주도시회의 동경 2008’도 참관하여, 다문화공생정책이 논의되는 최전선을 직접 지켜보았다. 자치체는 외국인주민과 일상적으로 직접 접하면서 이들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하는데, 늘 예산과 인력의 부족에 시달린다. 집주도시회의는 중앙정부의 보다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려는 의도로 2001년 13개 도시를 회원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2008년에는 26개 도시의 시장과 중앙정부 5개 부처가 한자리에 모여 정책을 논의하고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외국인주민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현실의 문제인지를 실감하였다.
오랜만의 일본 생활은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내외의 도전에 직면한 일본이 나름대로 돌파구를 모색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 일본이 최근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기는 하지만, 그 저력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단계 더 진화한 일본에 다시 가서 지낼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