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마사키는 그의 스승인 기노시타 게이스케보다 구로사와 아키라 성향에 가깝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가장 큰 주제가 ‘보편적인 휴머니즘의 추구’,‘사무라이 정신에 대한 향수’라면, 후배 감독인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작품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의 조건>을 통한 '극단적인 휴머니즘 추구‘와 <할복>(切腹,1962>과 <사무라이의 반란>(1968)에서 보여준 ‘사무라이 정신의 허구성 비판’이 주조를 이룬다.

과거 구로사와 아키라 세계에 빠져있던 필자에게 뒤늦게 접한 고바야시 마사키의 영화는 큰 충격이었다. 아니, 일본에도 이렇게 의식 있는 감독이 있었나? 하고 말이다. 당시 그에 대한 정보라고는 잭 앨리스가 쓴 ‘세계 영화사’라는 책에서 언급된 사무라이들의 할복을 소재로 한 <할복>이라는 영화가 구로사와 영향을 긍정적으로 받았다는 정도였다. 처음엔 이 작품이 일본 사무라이 정신을 ‘할복’을 통해 미화한 영화인줄 알았다. 막상 영화를 보니 사무라이의 고귀한 정신의 핵심으로 알려진 ‘할복(切腹)’은 그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폭로하고 있었다. 이후에 본 <사무라이의 반란>은 <인간의 조건>의 주제를 잇는 봉건제도의 허구성 폭로와 극단적인 휴머니즘을 지지하는 반골적인 주제가 담겨있었다. <사무라이의 반란>의 원제목인 ‘조우이치(上意討ち)’가 상급자의 부당한 명령을 격파한다는 의미이고, 부제인 ‘排領妻始末’이 영주의 명령을 거부한 부인의 시말이라는 의미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철저히 권력을 통해 인간(특히 여성)의 존엄을 철저히 짓밟는 영주들과 그의 꼭두각시 같은 사무라이 부하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 두 작품은 전쟁만행을 고발한 고미가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의 대하소설 각색작 <인간의 조건>(1959-1961)과 함께 고바야시 감독의 영화세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고바야시는 데뷔작 중편<자식의 청춘>(52)과 첫 장편 <진심>(53)은 스승인 기노시타 작품처럼 서정적이고 감상이 넘치는 홈드라마 같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종군기자로 참여하고 미군 포로생활을 직접 체험한 바 있는 그의 본격적인 스타일은 <벽이 두꺼운 방>(53)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작품은 같은 감방에 들어간 여섯 명의 B, C급 전범 얘기인데.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전쟁이란, 죄란 무엇인가를 물어간다. 시나리오는 실제의 전범수기로부터 발췌한 것이지만, 고바야시 자신의 포로체험이 강하게 투영되어져 있음이 틀림없다. 이 작품은 제작사 쇼치쿠에 의해 대미감정의 배려라는 이유로 3년간의 상영 연기라는 처분을 받았다. ‘전쟁의 진짜 희생자는, 무고한 수난을 당한 자 보다도,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일수록 더 크다’ 라는 주제는 그 후의 작품<인간의 조건>(9시간 34분짜리 6부작)에도 증폭되어 나타나고, <동경재판>(1983)에서도 크게 반영되어 나타난다. 고바야시는 1969년에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게이스케, 이치가와 곤과 함께 ‘사기회(四騎會)’를 결정해 새로운 일본영화를 직접 제작하고자 했지만, 그들의 첫 기획작인 <도데스카덴>(1970, 구로사와 감독)의 실패로 좌절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고바야시 영화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은 그의 많은 작품의 주인공으로 나온 나카다이 다쓰야(1932~)이다. 이번 영화제로, 작년에 이어 다시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 나카다이 다쓰야는 고바야시 마사키 영화 뿐 아니라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이치가와 곤 등과 같은 일본의 주요거장들의 영화에 함께 했다. 1960년대 초반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나 <쓰바키 산주로>에선 악역을 맡아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고바야시의 주요걸작 <인간의 조건>과 <할복>에서는 이상적인 휴머니스트 주인공 역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의 재회는 고바야시 감독에 대해 더 깊게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