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이후의 일본에서의 연구>
정신영
서울대학교 강사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2011년 8월말, 9월 학기 시작에 맞추어 동경으로 향하던 나의 심정은 단순히 앞으로 펼쳐질 새롭고 충실한 연구의 나날에 대한 기대만으로 충만한 것은 아니었다. 2011년 3월11일의 동일본대지진 이후에 여진뿐 아닌 방사선에 대한 걱정들이 특히 어린 자녀를 키우는 현지 부모들 사이에 확산되는 것을 지인이나 트위터를 통해 익히 알고 있던 터에 당시 만 1살의 아이와 같이 동경에 체재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직 친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지진과 츠나미에 의한 보다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가운데, 아이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물에 포함될 지 모르는 미소량의 방사성 물질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이기주의 일 수 밖에 없는 사회적인 분위기 또한 느껴졌었다. 하지만 일본현대미술에 대한 박사논문의 필드워크를 위해 일본에서 1년여의 연구기간이 주어지는 이 기회는 이런저런 걱정을 앞세우기에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기에 우리는 예정대로 동경 현지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식생활에 있어서는 좀 더 꼼꼼히 원산지를 확인하거나 피해가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는 지역의 식재료를 주문하여 구입는 방식으로 해결하였고, 혹시 또 있을지 모르는 큰 지진에 대비하여 옷장 속에 비상용 배낭을 준비하는 것 만으로도 심리적으로는 큰 안심이 되었다. 아이를 맡기는 보육원에서는 시설차원으로는 개인정보공개에 대한 규칙에 의거하여 학부모들의 비상연락망을 제공하지 않았으나, 이미 한번 큰 일을 겪은 엄마들 사이에는 긴밀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유사시에 직장에 발이 묶여 아이를 데리러 오지 못할 경우 서로간에 도울 수 있도록 긴 메일리스트를 공유했다. 이러한 실질적, 심리적 장치들을 통해 평화롭지만은 않은 일상을 유지해 가려는 일반인들의 노력은 3월11일 이래 큰 타격을 입은 일본사회가 정상궤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가장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연구생활에 있어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주된 연구대상들이 가득한 주요 현대미술관들과 도립중앙도서관이다. 롯본기 힐즈(六本木ヒルズ) 내의 모리미술관(森美術館)을 비롯, 도립현대미술관(東京都現代美術館)이나 요코하마미술관(横浜美術館)등에서는 필자의 주된 관심대상인 일본의 현대미술가들, 무라카미 타카시(村上隆), 나라 요시토모(奈良美智), 아이다 마코토(会田誠)들의 크고 작은 전시들이 이어졌으며, 작품자체를 실제로 접하는 기회는 물론, 작가에 대한 보도나 미술계의 반응, 사회적인 영향력 등을 현지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동시대를 사는 이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대형 전시를 앞두고 연예인 보다 더 바쁘다는 아이다씨와 장시간의 인터뷰 기회를 얻은 것도 행운이었다. 위에 언급한 세 명의 작가 모두가 이 시대 일본을 반영하는 중요한 작업을 남기고 있는 것은 확실한 반면, 어린 소녀의 얼굴만을 고집스럽게 담아온 나라에 있어서는 그 대중적인 인기에 가려 작품자체에 대한 이해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미흡한 작가이기도 했다. 때문에 요코하마에서 시작된 그의 개인전이 그가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살던 연고지인 아오모리의 현립미술관(青森県立美術館)으로 순회되는 것을 알았을 때 새벽 신칸센을 타고 현지에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가 소년시절을 보낸 눈 덮인 그 곳에 서서, 차가운 공기와 정적을 느끼며 하늘을 뒤덮은 짙은 눈구름과 이따금 마주치는 교복 옷깃을 여민 채 발걸음을 서두르는 하교 길의 학생들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미술관을 가득 채운 우수에 젖은 소녀들의 이미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는 듯한 개안(開眼)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 아오모리현립미술관(青森県立美術館)
▲ 아리스가와(有栖川)공원 |
거의 매일처럼 드나들던 미나토구(港区) 아리스가와(有栖川)공원 내에 있는 도립중앙도서관(都立中央図書館)은 현대작가들의 작품에 반영되는 오타쿠 문화를 비롯한 서브컬쳐 전반에 대한 배경연구가 필수적이었던 필자에게 끝없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비교적 절차가 복잡한 국회도서관에 비해 맨손으로 가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이 도서관에서는 근, 현대 인문학 서적은 물론 ‘제로세대’로 불리는 2000년대의 사회, 사상적 언설 들에 대한 자료를 충분히 얻을 수 있었고, 열람실도 넉넉하여 노트북만 가져가면 논문의 집필 자체도 얼마든지 가능한 또 하나의 연구실 역할을 해 주었다. 아직도 눈 앞에 선한 5층 카페테리아에서의 전망은 독서에 지친 눈을 휴식시키기에 적절한 공원의 우거진 숲과 테니스 코트, 그 뒤편으로 도심의 고층빌딩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훌륭한 것이었다. 3.11 이후의 일본의 모습에서 본 것은 잃을 뻔한, 또는 잃어버린 일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사의 의식이며 이를 필사적으로, 하지만 조용히 지켜내고자 하는 국민 개개인의 행보의 숭고함이었다.
프로필
컬럼비아대학교 현대미술평론 석사. 서울대학교 미술교육 협동과정 박사과정수료
전 서울대학교미술관(MoA) 큐레이터. Artforum, ArtAsiaPacific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