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飛鳥)에서 보낸 1년
강원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황소연
▲ 아스카마을 지도
나라(奈良)의 야마토야기역(大和八木駅)에서 공항버스가 출발하고서도 한참동안 하루미 씨는 버스정류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스카에서의 1년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귀국한다고 하자 하루미 씨는 “남의 가슴 속에 그토록 깊이 들어왔다가 홀연히 웃으면서 떠나갈 수 있는 거냐”고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아스카에서 보낸 1년은 하루미 씨 가족과 우리 가족이 한 가족처럼 친숙하게 보낸 시간이었다.
천리(天理)대학으로 연구년을 정한 것은 동경에서 가미가타(上方)문학을 전공했기에 오랫동안 간사이(関西)지역에서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천리대학은 유학시절에 학회 때문에 방문한 적이 있고 근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에 있어서 천리대학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2007년부터 학생들과 함께 부산에서 배를 타고 오사카(大阪)로 가는 코스로 나라, 교토(京都), 오사카를 주유하는 문화체험을 다니고 있다. 학생들은 항상 아스카보다는 오사카의 도톤보리(道頓堀)를 더 사랑하지만 나에게는 아스카에서 시작해 나라, 우지(宇治)를 거쳐 교토로 향한 고대인의 열정에 대한 로망이 있다.
▲ 아스카절 안에 있는 제비뽑기 를 묶어두는 곳
일본으로 연구년을 떠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던 참에 2011년 3월 11일에 동북(東北) 대지진이 발생해 많은 희생자가 났다. 유학 시절에 고베(神戸)대지진, 동경 사린 사건 등을 경험한 나였지만 원전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전소가 폭발하는 장면을 연일 매스컴에서 보도하는 가운데 고등학교 1학년인 큰 아이의 분위기는 자못 심각했다. 자기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저항하는 큰 애를 나머지 가족이 설득한 끝에 우리는 8월에 간사이 공항을 통해 일본에 입국하게 됐다. 일본 방송에서 연일 방사능 수치를 발표하는데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상생활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되도록이면 생선을 먹지 않으려고 했고 비를 맞아선 안될 것 같았다. 방사능문제는 생각할수록 엄청나고 심각한 문제이지만 예상과 달리 나라의 아스카 마을과 간사이 지방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 일본 최초의 절 아스카 사 입구(강원대학 교 일본학과 학생들) ▲ 아스카마을 풍경
2011년에 연구년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천리대학을 연구지로 정한 것을 안 와세다 대학의 나카지마 교수가 가시하라(橿原)에 있는 자신의 고택을 사용해도 좋다고 하셔서 아스카 마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본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루미 씨가 앞집에 살면서 고택을 잘 관리했다고 하지만 20여년간 사용하지 않은 말그대로 1970년대를 연상시키는 ‘소화시대의 박물관’인 상태였다. 한국의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내가 오래된 가옥의 이곳저곳을 수리하면서 처음으로 집과 가장의 역할에 대해서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고 주변사람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한 많은 사건들이 빈발했다. 돌이켜보면 1년간의 ‘캠핑생활’에 가까웠다. 아스카 마을이 있는 야마토 분지는 역사적인 장소가 너무나 많아 그 무게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하루미 씨는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요시노 친정에 아내와 함께 자주 놀러갔다. 덕분에 나도 일본인들이 노래하는 요시노 벚꽃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아내와 큰 아이는 다카토리(高取)마을의 전통축제와 고건축물의 전시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일본인의 일상생활을 접해 큰 도회지나 유학생들이 경험할 수 없는 일본인들의 사계절을 직접 체험하는 시간들이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매년 수백만명이 오고간다고 하지만 아직 야마토 분지에 사는 사람들이 춘천에 오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해외여행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 하루미 씨의 두 번째 해외여행이 춘천이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의 삶의 시계는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하기에도 너무나 짧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