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구마모토에서의 1년, 그립고도 보람된 재충전의 시간들

 

 

 

배 병 욱
| 동아대학교 사학과 강사 |

 

 

 

구마모토와의 재회


2012년 12월 일본국제교류기금 펠로십 프로그램에 공모할 때, 사실 나는 큰 기대는 없었다. 현지 지도교수님을 비롯하여 여러 추천인을 섭외하고 지원서 작성에도 나름의 최선을 다하였으나, 지원서 한 장으로 나에게 파격적 조건의 행운이 찾아올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4월 학과사무실로 배달된 두툼한 우편물을 받아들고서야 구마모토에서의 1년이 현실이 될 것임을 실감했다. 그러고도 또 1년 후인 2014년 3월 1일 내가 먼저 구마모토로 떠났고, 보름 뒤 아내와 6살 아들이 뒤따랐다. 2003년 자료조사를 겸한 여행으로 규슈를 순회할 때 하루 머물며 성과 아소산에 들른 이래, 구마모토와는 10년만의 재회였다.

 

 

 

구마모토와 부산, 지역과 지역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서

 

구마모토를 일본 현지연구의 대상지역으로 결정한 것은 ‘근대 조선에서의 구마모토 출신 언론인의 언론활동과 부산일보의 발행’이라는 연구주제에 맞추어 구마모토 지역사 연구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알려진 것처럼 구마모토는 일본 근대 언론인들의 산실이고, 조선에서 활동했던 언론인들의 다수도 구마모토 출신이었는데, 그 중 부산일보는 언론사 규모로 보나 인맥으로 보나 구마모토와의 연결고리가 반드시 해명되어야 했다.
이렇게 근대 일본의 한 지방, 그것도 해외의 한 작은 신문사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연구는 구마모토에서의 펠로십 기간 동안 한일 간 지역과 지역이 교섭하는 지역사연구로 확대되어 갔다. 메이지기 구마모토의 ‘해외사업’과 부산일보를 전후한 언론인 인맥이 파악되었고, 고급인력 양성과 해외수출을 담당하였던 명문학교, 종전 후 귀향한 조선 재주자의 회고록 등 방대한 자료를 섭렵할 수 있었다. 이 지면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할 수는 없고 향후 연구들로 이어지겠지만, 어쨌든 현지연구가 아니었다면 그 존재조차 몰랐을 자료와 연구주제들이 서가 곳곳에 누워있었다. 사실 현지에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이었지만, 필자가 머물렀던 구마모토가쿠엔대학(熊本學園大學) 역시 과거 해외인력 수출을 위해 동아시아 각국의 언어를 교습하던 곳이었고, 집이 있던 오오에(大江町)는 한국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근대 일본 언론인의 거두 도쿠토미 소호(德富 蘇峰)의 강학소가 있던 곳이었다. 그 역사의 현장에서 귀한 자료들을 섭렵하며 연구에만 몰두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펠로십 기간 동안 한일 간의 연구 환경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으나, 굳이 한 가지만 소개하자면 지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서비스하는 지역사 아카이브의 수준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이른 시기부터 중앙권력에 의한 지방통치체제가 이루어졌던 한국과 달리 일본은 오랜 지방자치의 역사적 경험이 있고 역사 기록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결벽증적 자세를 볼 때 지방사에 관한 한 높은 수준에 올라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실제 이정도인지는 정말 몰랐다. 구마모토시 역사문서자료실에는 메이지 초기의 신문들이 어느 하나 결호 없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굳이 도쿄나 교토, 또 타 지역에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알려진 자료는 모두 복사하여 소장하고 있었다. 속도와 편리함을 중시하는 한국인인 만큼 솔직히 다소 수동적(?), 혹은 재래식 시스템으로 여겨지는 부분도 없지 않았으나, 방대한 자료수집의 분량만큼은 압도적이었다. 일본 내에서 현립 공문서관이 없는 2-3개 현 중 하나가 구마모토현이라고 자괴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나마 이런 수준이라면 나머지는 어떠할지 각자의 상상에 맡기는 편이 좋겠다. 마땅히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부분이고, 연구자들도 이러한 미지의 필드에 빛을 보지 못한 새로운 자료들을 더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할 것이다.
귀한 펠로십 기간인 만큼 지역사 자료에만 매몰되는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학회 참관과 자료조사를 겸하여 도쿄와 교토도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저가항공(LCC)의 보편화로 규슈와 도쿄를 1만엔 이내의 교통비로 왕복하였으니, 장거리여행에 대한 경제적 부담도 덜한 편이었다.
돌아보면, 필자의 경우는 어쩌면 예외적 체험을 한 펠로가 아닐까 한다. 인류학이나 여타 학문분야와는 달리 역사학의 경우 대부분 도쿄나 교토를 현지연구의 대상지역으로 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장단점이 있겠고, 장점은 적극 활용하고 단점을 보완해가면서 알찬 기간을 보내야 할 텐데, 만사가 그렇듯 수료 후에서야 깨닫게 된 부분도 많다. 누군가 내게 펠로십 기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에 대해 물어온다면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많이 전해 줄 자신이 있는데, 간혹 가족을 대동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펠로가 있다면, 나의 경험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아내와 아들의 구마모토 사랑

 

처음 아내와 아들과 함께 일본에 간다고 했을 때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를 말렸다. 사실 나 역시 몇 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 연구에 전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미취학인 아들로 인해 몇 년째 육아에 매달려 있는 아내와도 이 기회를 공유하고 싶었다. 구마모토에서 아내는 아이의 유치원 친구들 어머니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한일 간 우호의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일본 주부들은 드라마와 요리 때문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구마모토에 한국인 인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일까? 우리는 단박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정착한 지 얼마 후부터 한국어를 배우는 모임을 열더니, 한국 요리 만들기와 일본 된장 만들기 체험을 하는 등 곁에서 보기에도 정말 부러운 시간들을 보냈다. 그 인연으로 지금도 서로의 안부를 전하며 재회를 기대하고 있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아마도 아들일 것이다. 처음 구마모토의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는 겉돌기만 해 걱정했으나 3~4개월 후부터는 아이들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쉬운 일본어 회화가 가능해져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육아의 환경 역시 양국 간 비교하면서 우리를 돌아볼 기회가 되었고, 해맑은 아이들의 교제를 보면서 한일 관계 역시 이와 같을 수 없을까 항상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다시 한 번 일본국제교류기금과 현지 지도교수였던 신명직 선생님, 구마모토에서 맺었던 귀한 인연들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