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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올여름 21회를 맞이한 <2015 창무국제무용제>에서 야마다 세쓰코의 춤을 보았다. 세쓰코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지속적으로 연락해왔지만 그녀의 솔로공연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야마다 세쓰코가 처음 창무춤터 무대에 선 것은 1986년 <창무아시아댄스페스티벌>에서다. 그녀는 외국인 참가 댄서 중에서도 가장 고참이었고, 그 후에도 그녀는 대한민국 무용계와 꾸준히 친분을 유지해왔다. 지금까지 그녀의 춤을 몇 번이고 접했지만, 이번 <2015 창무국제무용제>에서 본 그녀의 춤은 특히 훌륭했다.
본인도 만족스러웠는지 공연한 날 밤 세쓰코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평소 보다 훨씬 말 수가 많았다. 자신의 춤과 한국의 춤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 했고, 특히 같은 날 공연한 김선미의 <볼레로>를 격찬하며 현대한국무용, 즉 한국창작무용은 이제 새 장을 열었다고도 했다.

'모든 것은 김매자로부터 시작되었어요.'

야마다 세쓰코의 이야기 안에는 그들만이 아는 김매자가 따로 있었다.
필자는 그것을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으며, 이웃나라의 무용가인 야마다 세쓰코가 바라 본 <김매자와 한국창작 춤 이야기>와 역으로 한국의 무용가 김매자가 바라 본 <야마다 세쓰코와 일본 춤 이야기>로 엮어나가고자 한다. 두 사람의 만남에는 30년의 역사가 있다.
두 무용가는 필자의 기록물제작 제안에 흔쾌히 찬성해주었다. 두 사람의 상호 인터뷰를 중심으로 풀면서,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추가해 특별한 '한일교류 30년' 이야기를 만들려고 한다. 그 첫회는 김매자가 세쓰코를 초대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일본은 멀고도 먼 나라였다

2015년 9월, 필자는 김매자를 인터뷰하기 위해 서울 잠원동 창무예술원 사무실을 찾았다. 필자에게 김매자가 있는 풍경은 항상 홍대 앞 또는 아르코예술극장이 있는 대학로였다. 필자가 김매자를 처음에 알게 된 것 역시 1993년 홍대 포스트극장에서 열린 일본부토페스티벌 때다.
그 때문인지 강남에서 그녀를 만다는 것은 뭔가 화려하면서도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만난 김매자는 언제나 그렇듯 반가운 미소로 맞아주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자 감미로운 환상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가까운 줄 알았던 일본은 그저 먼 나라였습니다.'

야마다 세쓰코와의 만남에 관한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는 일본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처음 일본에서 공연을 할 때였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저는 굉장히 슬펐습니다. 일본기자들이 이렇게까지 한국을 모르나? 대한민국은 무시당하고 있다. 한국무용은 커녕 이 사람들은 한국문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김매자가 처음으로 일본무대에 선 것은 1988년에 개최된 <제1회 도쿄국제연극제>였다. 시부야에서 열린 도쿄국제영화제에 대항하여 이케부쿠로에서 출범한 이 연극제는 당시 일본 언론들의 높은 관심을 모았으며, 공연 한 달 전에는 외국 출연자들을 도쿄에 모아 기자회견도 가졌다.

'처음에는 문화부 기자라 그런가 싶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부 기자가 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이 안 되니까 할 수 없이 문화부 일을 한 기자들도 꽤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은 그렇지 않잖아요'

일본에 대한 첫인상은 한마디로 '큰 실망'이었다.

'우리도 일본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일제강점기를 경험해 기본적인 것은 압니다. 억압의 시대였다 하더라도, 경험했다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일본 쪽은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게 충격이었어요'

자유와 호화스러움이 뒤섞인 버블시대의 도쿄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이벤트로 들어 서는 초입에 한국의 무용가가 본 것은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였다. 돌이켜보면 한류 붐이 일기 전 일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사실 일본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보다 훨씬 전인 1968년에 한양대학교 학생들을 인솔해 간 적이 있었죠. 규슈대학교의 초대를 받았고요. 당시에는 배를 타고 가서 뱃멀미 때문에 엄청 고생했지만, 그 이외에는 괜찮았습니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인솔한 것이라 기분 나쁜 일도 특별히 없었고요. 그것보다는 일본의 발전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는 100년정도의 차이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속상한 마음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매자는 연극제 일로 한 달 후 다시 일본에 가게 된다. 그곳에는 기자회견 때의 슬픔을 날려버릴 만한 좋은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3회에서 이어가도록 한다) 김매자가 이런 억울함을 느낀 것은 단지 일본에서만이 아니었다. 이제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려 한다. (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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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昨年の夏、ソウルで山田せつ子さんのダンス公演を見た。第21回目を迎えた創舞国際舞踊フェスティバルの招待公演。「せつ子さん」は旧知であり、ちょくちょく連絡もとりあっているのだが、ソロのダンスを見るのは久しぶりだった。
山田せつ子が初めて創舞会の舞台に立ったのは30年前、1986年のことだ。彼女は外国人ダンサーの中でもっとも古参のフェスティバル参加者であり、その後も韓国の舞踊界と交流を続けてきた。何度も見た彼女のダンスであるが、今回の作品は特に素晴らしかった。 本人も満足のいくものだったのだろう、その夜の山田せつ子はとても上機嫌で、いつになく饒舌に自分のダンスのこと、韓国のダンスのことなどを語った。同じ日に踊ったキム・ソンミのボレロを絶賛し、現代韓国舞踊は新境地に達したという話にもなった。

「すべてはキム・メジャ(金梅子)から始まったんです」

山田せつ子の話の中には、彼女だけが知るキム・メジャがいた。それを、ぜひとも記録に残したいと思った。隣国のトップダンサーから見たキム・メジャと現代韓国舞踊の話。ならば、逆の話も聞いてみたい。現代韓国舞踊の第一人者が見た山田せつ子と日本のダンスの話。二人には出会ってから30年の歴史がある。
二人とも記録づくりを快く承諾してくれた。両者へのインタビューを交差させて、ここだけのダンスの話、日韓交流30年の物語を振り返ろうと思う。初回のインタビューはキム・メジャ、彼女が山田せつ子を招請するまでのプロローグである。



 

日本は遠い遠い国だった

2015年9月、私はキム・メジャのインタビューを、蚕院洞にある創舞会のオフィスで開始した。私が彼女に初めて会ったのは1993年、弘大前のポスト劇場で行われた日本舞踏フェスティバルであり、その後もキム・メジャがいる風景は弘大前や、アルコ劇場のある大学路だった。なので、江南で彼女に会うのには少し華やぐような、いつもと違う緊張感があった。

 「近いと思っていた日本。でも、それはとても遠い国でした」

のっけから華やいだ気持ちは、そのままの形で硬直してしまった。山田せつ子との出会いについてのインタビューで、まず出てきたのは「日本」だった。

「初めて日本の舞台で公演をした時のことです。記者会見で質問に答えているうちに、だんだん悲しくなってきました。日本人はこんなにも韓国を知らない。韓国はこんなにも知られていない。舞踊どころではないんですよ。韓国文化について、何も知らないんです。」

キム・メジャが初めて日本の舞台に立ったのは、1988年に開催された第1回東京国際演劇祭である。渋谷の東京国際映画祭に対抗して、池袋で始まった鳴り物入りのイベント。公演の一ヶ月前には出演者による記者会見が開かれ、多数のメディアが詰めかけた。

「文化部の記者だから仕方がないのかなと思ったのです。当時の韓国だと、政治記者になれずに不本意に文化部にいる人もいたので。でも、日本はそうではなかったんですね。」

日本に対する最初の印象は「失望だった」という。
「私達も日本について多くを知ってい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でも、「日本時代」(日本の植民地時代)を経験しましたから、日本文化についても基本的なことは知っているんですよ。抑圧の時代だったにしろ、経験したことは事実。ところが日本人の側は何も知らない。ショックでした」 自由と絢爛さが混じったバブル時代の東京を象徴するグローバルイベント、その入口で韓国の舞踊家が見たのは日本人の韓国に対する無知と無理解だった。ふりかえれば韓流ブーム以前の日本で、韓国への関心は非常に限られていた。

「日本に行ったのは、その時が初めてではありません。それよりもずっと前、1968年に漢陽大学の学生を引率して行きました。九州大学の招待でした。当時は船で行ったので、船酔いはひどかったのですが、それ以外では別に嫌な思いはしませんでした。教師として単に学生を引率しただけですから。それによりも日本の発展ぶりがまぶしかった。韓国とは100年の差があると思いました」

傷心して韓国に戻ったキム・メジャだが、その一ヶ月後には演劇祭の本番で再び日本を訪れることになる。そこでは記者会見での切なさを吹き飛ばすことが待ち受けていた。

ところで、キム・メジャが悔しさを味わったのは日本でだけではなかった。時代を少し遡ることにする。 ( 次回に続く )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