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토 준코
김매자의 일본진출 "도쿄국제연극제"
김매자의 일본 데뷔는 1988년, "도쿄국제연극제 '88 이케부쿠로(현·페스티벌도쿄)"에서다. 이케부쿠로 지역을 중심으로 기획된 도쿄국제연극제 이케부쿠로는 시부야의 도쿄국제영화제를 의식하고 출범한 또 다른 축제이다. 이 축제에는 전통예술, 신극, 실험극, 무용 등 총 42단체가 참가하고, 2,777개의 공연이 오르는, 당시 일본에서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축제였다. 그 연극제를 총괄하는 사무국장은 시인 야기 추에이(八木忠栄)였다. 참가하는 42단체 중 해외 단체는 오직 다섯. 야기는 그 중 한 팀으로 김매자가 이끄는 한국의 창무회를 연극제에 초청했다.
2005년 연말, 도쿄에서 야기와 그 부인 노부코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무언극과 무용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부토도 유럽의 연극제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고요. 우리 도쿄연극제에서도 연극뿐 아니라 아직 일본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 무용단도 초청하고 싶었어요."
야기에게 김매자를 추천한 사람은 바로 야마다 세츠코였다.
"1987년쯤이었어요. 세츠코 씨가 '저는 지금 한국무용에 주목하고 있다'면서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용이어서 굉장히 놀랐어요. 전통을 제대로 따르면서도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메시지가 있는 무용. 저와 스태프들 모두 좋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초청 팀에 포함시켰습니다."
야기는 당시의 프로그램북까지 가져와 보여주었다. 두꺼운 그 책의 무게는, 축제의 규모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5개의 해외 팀은 국내 팀보다 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ELS COMEDIANTS', 이탈리아의 'COLOMBAIONI DE FELLINI' 인도의 'SOPANAM', 그리고 한국의 창무댄스컴퍼니, 마지막으로 미국의 'THE NATIONAL THEATRE OF DEAF'. 그 개성 있는 라인업을 보면 제작진이 얼마나 신중하게 단체를 선정했는지 알 수 있다. 아래에 프로그램북에 실린 창무회 소개부분을 일부 발췌한다.
"전통 한국무용의 철저한 단련을 통해서 얻은, 집중과 핵심이 흐르는 이 무용은 섬세하면서도 강한 구심력을 가지고 있다. 그 풍부한 무용언어에서 "춤 자체"에 미지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 도쿄국제연극제 '88 이케부쿠로, 공식 프로그램 ]에서
이제 막 시작된 한일문화교류
야기를 비롯한 연극제 스태프들이 자신 있게 초청하기로 한 창무회였다고 해도, 일본에서의 인지도는 전혀 없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 연재의 프롤로그에서 말했듯이, 페스티벌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김매자는 기자들의 엉뚱한 질문에 속상해 했다.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는 사이에 점점 슬퍼졌습니다. 일본인은 이렇게까지 한국을 모른다."
야기는 '김매자 선생님께 정말 미안하게 됐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일본이 가지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판소리, 탈춤 등 민속놀이가 그나마 조금, 그리고 한국영화나 사물놀이를 아는 사람은 있었지만 대중적 관심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음악계에서는 이미 전설적인 이야기가 된, 한국 사물놀이의 일본 첫 공연은 1982년이었다. 그들이 일본 음악계에 던진 충격은 파격적이었다. 필자 역시 그 때 음악을 하는 친구가, '한국에 기가 막힌 타악기 팀이 있다'며 그들의 음악을 들려주었고, 사물놀이가 계기가 되어 '난생 처음 한국에 관심을 가졌다'는 일본인도 있었다. 한편,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한국에 관심을 가진 연극계도, 이 즈음에야 겨우 한국 극단을 초빙하게 되었다. [초분](1980), [어머니](1982)의 연출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극작가 오태석이, 극단목화를 이끌고 토가 연극제에 참가한 것이 1987년의 일이었다.
그 외에도 판소리의 김소희, 민족무용의 김숙자, 극단 민예의 마당극, 인형극의 심우성 등도 일본을 방문하여 공연을 했지만 모두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세계 무대로 급부상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문화도 이 시기에 해외 아트 신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준비 단계에서는 언론의 반응도 별로 좋지 않았던 김매자와 창무회였으나 막상 무대가 막을 올리면 그 신선한 춤은 금새 화제가 됐다. 야기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창무회와의 첫 만남이었다. (중략) 일본 최초공연인 탓에 관객에게는 낯선 단체였지만 [춤본], [꽃신]을 비롯한 4작품에 대한 높은 평가가 순식간에 확산되면서 날이 갈수록 객석은 팽창했다." ― ([한국문화] 1996년 12월)
김매자 역시 기자회견 때의 절망감을 뒤로 하고 페스티벌에서의 멋진 만남을 돌아본다.
"일본 관객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야마다 세츠코와 야기 선생 부부는 항상 우리를 도우려고 노심초사해 주었어요.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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