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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또다시 "한국무용이란?"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김매자와 창무회 무용수들이 최승희의 작품을 '재현'하는 장면이다. 지금의 시대와 달리 동영상이 얼마 남지 않아 많은 작품은 제목과 사진 몇 장을 참고로 전체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 재현 작업 장면은 최승희의 작품 속에 있는 '한국적 요소'를 분해하고 가시화시켰다.

일본인들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장면인데 과연 김매자는 어땠을까? 김매자가 한국무용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1950-60년대는, 최승희 본인은 부재했지만 그녀가 만든 '신무용'은 한국에서도 계승되어 있었다. (그녀는 1946년에 북한으로 넘어가서 거기서 활동하다가 1967년 이후에 소식이 끊어졌다). 김매자는 최승희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신무용'을 제대로 배운 세대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김매자는 마침 이 '신무용'에 한계를 느끼고 다시 한국 전통으로 회귀함으로써 현대에 통하는 새로운 창작무용을 빚었다. 영화에서는 그 과정을 최승희의 작업과 오버랩시키고 있다. 김매자는 영화 팸플릿에 이렇게 적었다.

"이 영화에는 최승희가 작품을 창작한 과정과 제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영화로 그녀가 진정한 예술가로 잘 살아온 것을 제 나름대로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을 시킨다.

"한국무용의 근본은 즉흥적이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춤입니다. 관객 여러분 누구라도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8월 창무국제무용제의 야마다 세츠코 공연을 계기로 시작했던 본 연재는 그 후 1년이 되어 일단 이번 호를 끝으로 마치려고 한다. 지난 1년 동안 두 무용가를 쫓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과거의 문헌이나 자료수집에 몰두하기도 했다. 또 못 보던 공연기록이나 영상물도 이 기회에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다.

1986년에 김매자가 야마다 세츠코를 한국에 초청하면서 시작한 두 사람의 무용 교류. 그 후 야마다 세츠코는 해마다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무용계에 자극을 주었다. 김매자 또한 1988년 일본 진출 후 일본에서 많은 공연과 워크숍을 열고 춤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들과도 호흡을 맞췄다.

야마다 세츠코는 "우리의 옛날이야기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의 현재 이야기도 다뤘으면 좋겠다"고 했고, 김매자도 "무용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아티스트들의 협업도 훌륭했다"고 이 30년간에 교류가 크게 번지는 것을 강조했다. 다음에 기회가 있었으면 그 부분도 다루고 싶다.

이번 호 마지막에 야마다 세츠코에 대해서도 한마디 더 쓰고 싶다.

한국이 아직 '닫힌 나라'였던 1980년대, 한국 무용계에게 야마다 세츠코의 춤은 큰 충격이었다. 그 영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당시 기사와 논문 등을 찾다가 월간 「춤」 1987년 12월호에 게재된 무용평론가 김태원 씨의 공연평을 발견했다. 당시 상황을 알기를 위해 첫머리 부분을 인용한다.

"제9회 대한민국 무용제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공연되었던 일본의 부토춤꾼 야마다 세츠코의 워커힐 미술관(10월 21일)과 창무춤터(23-25일)에서의 [녹색의 열 ― 1999년 나선의 기류를 위해서] 내한공연은 아마도 춤이 줄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한국 춤계를 충격시켰을 뿐 아니라 반성시키기도 했다.

그 충격은 세츠코의 군살 없이 정련된 신체, 최면을 거는 듯 강한 집중력, 마임 동작을 섞어 춤 표현의 디테일을 획득하는 힘, 그리고 춤 작업을 통한 미래의 정신적 기류 형성에 몸 바치는 겸허함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반성은 우리의 춤꾼들 중 과연 얼마 정도가 그만한 춤의 기량과 영혼의 높이를 갖고 있을까 하는 것에서 나온다."

마치 격문 같은 공연평의 제목은 "새를 쫓는 소녀의 [열병앓이]", 김태원 씨는 무대 위의 야마다 세츠코에 "무서운 열병앓이의 소녀의 모습"이라고 썼는데 이 평론도 마치 열병에 걸린 듯하다. 자신을 포함한 무용계 전체에 맹렬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한편 야마다 세츠코의 손의 움직임을 극찬하고, 괄호 쓰기로 이런 문장까지 덧붙이고 있다. (나에게 세츠코의 손은 마리 뷔그만의 손 이후 가장 표현적인 손으로 보인다)

이를 읽으면서, 연출가 이병훈 씨의 말을 떠올렸다.

"1980년대 후반 무용계도 연극계도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한 우리가 다음 어디로 가야 할까? 야마다 세츠코의 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통찰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체이며 또 그 속에 있는 정신입니다. 저는 그녀의 춤을 소개해서 우리 무용계에 자극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부터 30년 전 이병훈 씨가 김매자에게 건넨 한 편의 비디오에서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침 '나선의 기류' 속에서, 때로는 솔로로, 때로는 군무를 맞대고 지금도 '공연'을 계속한다. 과연 다음에는 어떤 전개가 기다리는지 필자도 계속해서 따라갈 생각이다.

이 연재에서는 김매자 선생님과 야마다 세츠코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에게 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를 드리고 싶다. 두 분은 지금도 현역 무용가이라 어느 날은 서울의 포스트 극장에서 연습 대기 중인 김매자 선생님을 만나고 그 다음 달에는 도쿄의 텔레뿌시코루에서 연습을 마친 야마다 세츠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연습장에서 땀을 흘린 두 사람은 무대에서 보는 화려한 모습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마지막이 되었지만, 나의 서투른 한글 원고를 정중하게 교정해주신 월간 「몸」 편집부 조아라 기자와 손예운 기자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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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再び、「韓国舞踊とは?」


ところで、この映画『伝統の舞姫・崔承喜――金梅子が追う民族の心』の中で白眉とも言えるのは、金梅子と創舞会のメンバーたちが、崔承喜の作品を「再現」するシーンだ。今の時代と違って、動画はわずかしか残っておらず、多くの作品はタイトルと数枚の写真を頼りに全体を想像するしかない。その再現作業のシーンを見ながら、なるほどと思った。こうすることによって、崔承喜が自らの舞踊に取り入れた「韓国的要素」を、分解して可視化することができるのだ。

日本人から見ると非常に興味深いシーンなのだが、果たして金梅子にとってはどうだったのだろう。

金梅子が舞踊を専門的に習い始めた1950~1960年代、崔承喜本人こそ不在だったものの、彼女が作った「新舞踊」は、韓国でもそのまま引続がれていた。(崔承喜は1946年から北朝鮮で活動し、1967年以降は消息不明となっている)。金梅子はまだ崔承喜の体温が残る「新舞踊」を真剣に学んだ世代である。

そして、金梅子はまさにこの「新舞踊」に限界を感じ、もう一度韓国の伝統に回帰することを通して、現代に通用する新しい創作舞踊を創りあげた。映画ではその様子を、崔承喜の作品作りとオーバーラップさせている。金梅子は映画のパンフレットにこう記している。

「この映画には崔承喜が作品を創作する過程と、私が作品を創作する過程がよく表現されていると思います。私はこの映画を通して、彼女が真の芸術家としてよりよく生きてきたことを、自分なりに理解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そして、韓国舞踊について、あらためてこう結論付ける。

「韓国舞踊の根本は、即興的で型にはまらない、自由な踊りです。観客の皆さまが、誰でも、いつでも始めることができる、と感じて頂ければ幸いです」



連載の終わりに


昨年8月の創舞国際舞踊フェスティバルの山田せつ子公演をきっかけに始めた本連載だが、あれからちょうど1年、ここで一旦、終わりにしようと思っている。この1年、2人の舞踊家を追いかけながら、様々な人にインタビューし、過去の文献や資料にあたってきた。また、見逃していた公演記録や映像なども、この機会にあらためて見ることになり、それはとても楽しい時間だった。

 1986年に金梅子が山田せつ子をフェスティバルに招請することで始まった、2人のダンス交流。その後、山田は毎年のように韓国を訪れ、韓国のダンスシーンに刺激を与え続けた。金梅子もまた1988年の日本初公演以来、日本で幾度とない公演やワークショップを行い、舞踊だけでなく他分野のアーティストとの共演なども行ってきた。

山田せつ子は、「私たちの古い話だけでなく、若い人たちの今の話もとりあげてほしい」と言い、金梅子もまた、「ダンスだけでなく、他のジャンルのアーティストたちとのコラボレーションも素晴らしかった」と、この30年間での交流の広がりを強調した。それらについても、また次に機会があればと思っている。

この回の最後に、山田せつ子についても、少しだけ書いておきたい。

韓国がまだ「閉ざされた国」であった1980年代、韓国の舞踊会にとって、山田せつ子のダンスは大きな衝撃だった。その大きさをどう表現すればいいのかと、当時の記事や論文などを探していたところ、月刊「チュム」1987年12月号月に掲載された舞踊評論家キム・テウォン氏の「公演評」を見つけた。当時の韓国舞踊界の様子が伝わると思うので、冒頭部分を引用したい。

  「第9回大韓民国舞踊祭が行われている中で公演が行われた、日本の舞踏ダンサー山田せつ子のウォーカーヒル美術館(10月21日)と創舞チュムトー(23~25日)での『緑色の熱―1999年の螺旋の気流のために』の公演は、おそらくダンスとして可能なかぎりの最上の美しさで、韓国の舞踊界に衝撃を与えただけでなく、反省をも促した。

その衝撃は、せつ子のゆるみのない精錬された身体、催眠術をかけたような強い集中力、マイムのような動作を交えながらダンスの表現のディテールを獲得する力、そしてダンス作業を通して未来の精神的気流形成に身体をささげる謙虚さなどによる。そして、反省とは、果たして我が国のダンサーの中でどれほどが、これほどのダンスの技量と魂の高さをもっているかという点である」

まるで檄文のような公演評のタイトルは、「鳥を追う少女の『熱病』」とある。キム・テウォン氏は舞台の上の山田せつ子に「恐ろしい熱病にかかった少女の姿を見た」と書いているが、この評論もまた、まるで熱病にかかったかのようだ。自分自身を含めた舞踊界全体へ猛烈な反省を促しつつ、一方で山田せつ子の手の動きを絶賛しながら、カッコ書きでこんな一文を加えている。(私にとってせつ子の手は、マリー・ヴィグマンの手以降でもっとも表現的な手に見えた)

 これを読みながら、演出家のイ・ビョンフン氏の言葉を思い出した。

 「1980年代後半、韓国では舞踊も演劇も混迷していました。社会の民主化を実現した私たちは、次はどこに向かえばいいのか? 山田せつ子の舞踊は、自分自身への徹底的な洞察です。それは自身の身体であり、その奥中にある精神です。私は彼女のダンスが、韓国の舞踊界にとって大きな刺激になればと思ったのです」

 今から30年前、イ・ビョンフン氏が金梅子に渡した一本のビデオ。そこから始まった、山田せつ子と金梅子の共演は、まさに「螺旋の気流」の中で、時にはソロで、時には群舞を交え、今も続いている。果たして、次にはどんな展開が見られるか、私はずっと2人を追い続けるのだと思う。

この連載では金梅子先生と山田せつ子先生をはじめ、多くの関係者から貴重なお話をうかがった。この場を借りてお礼を申し上げたい。お二人は今も現役まっただ中で、ある日はソウルのポスト劇場で「これから稽古」という金梅子先生に会い、その翌月には東京のテレプシコールで「稽古が終わったところ」の山田せつ子先生の話を聞いた。年齢を重ねるほどますますパワフルになるお二人に、負けないように頑張りたいと思う。d

最後になったが、私の拙い韓国語を丁寧に校正してくれた、月刊「モム」編集部のジョ・アラさんとソン・イェウンさんに、心からお礼を申し上げたい。本当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