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토 준코
일본인들은 한국무용을 어떻게 봤는가?
이 때, 창무회의 공연을 보고 흥미로운 리뷰를 남긴 사람도 있었는데, 바로 일본 평론가 미우라 마사시다. 1970년 『유리이카』, 『현대사상』등의 평론지를 창간하고, 무용잡지 『댄스매거진』 편집장도 역임한 미우라는 문화예술 모든 장르에서 뜨거운 담론을 펼친 일본 언론계 유명인사다.
그는 1934년 창간된 오래된 연극잡지 [테아터로]에 '도쿄국제연극제를 보고'라는 글을 실었는데, 지면의 대부분이 창무회, 특히 '김매자의 한국무용'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리뷰는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았고, 김매자 역시 아는 바 없다고 하니 여기서 일부분만 소개한다.
"김매자가 이끄는 창무댄스컴퍼니 공연에 강하게 매력을 느낀 것은 내가 프랑스의 고전발레를 본 탓인지도 모른다. (중략) 작품을 얼핏 봐도 강미리와 김연희는 김매자보다 한 세대 아래의 안무가임을 알 수 있었는데, 모두 현대무용의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로 나를 끌어당긴 것은 그들에 비하면 약간 구식이라고 할 수도 있는 김매자의 안무작이었다. 한국의 무용은 발레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작품에서 강하게 느낀 바다. 그 매력의 중심은 역시 '발놀림'이었다." ― ( [테아터로] 1988년 11월호 )
미우라는 발레 평론가로서도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위 기사의 서두에는 후대에 복원되어 무대에 다시 오른, 클래식 발레 형식 이전, 베르사유의 바로크 발레에 대해 논하며 시작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발놀림'이었다. 궁중에서 추던 발레의 특유의 의상, 그 밑에서 발만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그 발놀림을 중심으로, 발레는 이윽고 무대예술로 발전되었고, 미우라는 그와 같은 발놀림을, 김매자의 한국무용에서도 봤다고 한다.
""물론 발레와 한국무용을 직접 비교하면 유사점보다 차이점이 훨씬 많다. 의상도 다르고 움직임도 다르다. 하지만, 둘 다 발놀림의 예술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일본의 무용을 떠올린다면 그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 [테아터로] 1988년 11월호 )
일본의 무용은 위로 뛰지 않는다. 위 글에서 미우라는 위로 뛰지 않는 일본과 뛰는 한국의 무용 움직임의 차이 또한 언급했다. 같은 농경사회를 거친 민족이면서도 가축을 기르지 않았던 옛 일본인과, 수렵과 축산을 한 옛 한국인의 습성의 차이를 설명하며 덧붙였다. 미우라는 실제로 김매자가 젊었을 때 농촌을 돌며 민속춤을 배운 것은 모르고 쓴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우라는 김매자의 무용을 보면서 같은 동아시아에 있으면서도 일본과는 전혀 다른 한국 옛 전통 삶의 풍경을 상상하고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춤이라는 것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또 문화교류는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
문화교류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한일문화교류는 민간 주도로 시작되었고, 양국의 예술가들의 개인적 관계가 그 흐름을 만들어냈다. 반면, 일본에게 있어, 같은 동아시아 국가 중 하나인 중국과의 관계는 한국과의 그것과 대조적이었다. 중일문화교류의 초기는 정당, 정부, 기업 등이 주도했지만, 한국과 일본의 경우는 개인과 개인의 연결이 층층이 쌓여 점차 굵고 튼튼한 파이프가 된 것이다. 김매자와 야마다 세츠코가 그랬고, 연극이나 음악 등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극작가인 오태석과 카라 쥬우로(唐十郎), 사물놀이의 김덕수와 야마시타 요오스케(山下洋輔)…, 초기 1세대 아티스트 간의 신뢰적 관계가, 그 뒤를 잇는 예술가들 간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은 이 교류를 지탱한 사람들이다. 그 일의 대부분은 "재일 한국인"들이 맡았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면서도 지금까지 이에 대한 언급이 전무했다.
야마다 세츠코의 한국진출을 지지한 남편 남상길이 있었고, 그 동생 남상영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언급한 바 있다. 사물놀이의 경우에는 일본진출 계기를 만든 것이 재일 한국인 사업가이며 그것을 도운 사람은 김덕수의 부인 김리혜였고, 그녀도 역시 재일 한국인 2세였다. 오태석의 경우도 일본 연출 초기, 이삼랑(李三郎), 주원실(朱源実), 이예선(李麗仙)등, 많은 재일 한국인 배우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그 밖에도 많은 재일 한국인들이 통역이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면서 예술가를 도왔다.
'말은 안 통해도 우리는 서로 잘 안다'라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 국제교류 현장에서는 통역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통역자로 야마다 세츠코의 인터뷰에서 뜻밖의 이름을 들었다. 바로 이양지(李良枝)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름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김매자와 야마다 세츠코의 관계에서 그녀를 생각하지 못했다.
이양지
이양지(1955~1992)는 일본에서는 아주 유명한 소설가이다. 재일 한국인 2세인 그녀는 1980년대에 한국에 유학을 와 그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유희』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서울대학교 국문과에서 공부한 뒤 이화여대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김매자의 제자였다.
"이양지씨, 잘 기억하고 있어요.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처음부터 다른 사람과는 달랐어요.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어요."
일찍 세상을 떠난 제자의 이름을 들은 김매자는 슬픔과 반가움이 엇갈린 표정으로 아주 멀리 보듯 천천히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본론에서 조금 벗어날지 모르지만 그 내용을 여기에 적어 두고 싶다. 김매자의 이야기에서, 춤추는 이양지씨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양지씨는 불교의식과 한국무용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제 강의를 아주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녀가 쓴 논문은 대학에 가면 남아있을 거예요. 무용도 잘했죠. 김숙자 선생한테 조금 배웠다는데 정말 잘했어요."
"저야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도 많이 가르쳤죠. 그런데 같은 한국계라 해도 중국 동포와도, 또 일본인 유학생과도 달라요. 중국에서 한국무용을 하는 동포 학생들은 단순히 무용 기술을 배우려고 해요. 전문성과 예술성을 높이려 하는 거죠. 그런데 재일동포학생 같은 경우에는 무용보다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예술성보다는 민족성. 그 생각이 아주 강해서, 무용을 그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경향도 조금 있어요."
"그렇지만 양지 씨는 더 여유가 있었습니다. 잘하던데요, 정말 잘했어요. 그녀를 잃은 것이 아주 슬프고 너무 안타까워요."
"육체는 해방되어야죠. 한국의 전통 춤 속에서는 영혼도 육체도 해방되어요. 한국의 전통무용은 원래 자유로운 영혼과 육체로 춤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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