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경숙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센터 연구원)
후카사쿠 긴지(深作欣二 1930-2003)감독은 40년에 걸쳐 63편에 달하는 작품을 임협(任俠)영화는 물론 시대극, 인정 희극 등 특정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오락영화를 만들었다. '의리 없는 싸움' 시리즈를 통해 70년대 깡패 실록(實錄)영화가 탄생했는데, 이 새로운 일본 액션 영화는 홍콩 액션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할리우드에까지 진출하는데 실질적인 징검다리 노릇을 했다. 우리에게는 2002년 개봉되었던 영화 <베틀로얄>의 감독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중학생 42명에게 무인도에서 서로 죽고 죽이게 한다는 내용으로 독특한 폭력 묘사가 압권이다. 절대적 카오스의 와중에서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강한 욕구가 생겨난다는 메시지는, 그 반체제적 문제 제기가 범상치 않아서인지 일본열도를 화제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사회의 모순이나 어른들에 대한 반감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작품을 주로 그려왔다. "영화 만드는 것은 전쟁이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후카사쿠 감독은 그의 작품 세계 내내 기존 권력 및 고정관념에 대항해 싸워왔다. <의리 없는 싸움>시리즈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과격한 폭력묘사에 대한 감독의 참뜻은 삶에 대한 희망을 다시 한번 사회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본다.
도에이 영화사에서 주로 활동해왔으며 '거장', '작가'라는 칭호보다는 상업감독, 직업감독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암을 선고받고도 작품을 손에서 놓지 않고 칠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하던 그는 베틀로얄 후속편을 유작으로 남긴 채 작년, 우리 곁을 떠났다. 이렇게 장수하는 감독들의 모습을 통하여 일본영화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특히 감독들이 단명하는 우리 영화 현실과 비교해 볼 때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중요한 감상 포인트는 바로 어린 시절의 회상장면인 프롤로그 부분이다. 세피아톤 처리와 함께 역광으로 그려지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영상은 이 영화의 전부를 시사해 주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향수를 환타스틱한 느낌으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장면을 연출한다. 여기에는 촬영감독 기무라 다이사쿠(木村大作)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는 카메라의 테크닉 사용 그 자체보다는 피사체에게 더 신경을 써야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촬영에 임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는 조명의 중요성을 스스로 체득한 몇 안 되는 일본 촬영 감독 중의 하나이다. 화조(畵調), 화면구도, 빛과 그림자, 거기에 색감과 영화 전체의 방향을 결정짓는 톤을 화면에 요구한다. 애잔함과 거칠음이 병치되는 '교차'의 미학을 통해서 이뤄지는 영상은 우리들의 감정선을 그 밑바닥까지 건드려주는 듯 하다.
엄마에 대한 애증이 40년이 지난 뒤에 주인공 가즈오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어머니와 같은 사투리를 쓰는 솔직 담백한 여성에게서 새삼 엄마의 체취를 느끼며 묘한 호감에 사로잡힌 채 관심이 끌리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주인공을 볼 때 관객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심리가 작동한다. 이런 부분을 영화는 꼼꼼히 잘 처리 해 주고 있다.
어린 시절 가즈오가 느끼는 감정은 프로이드가 말하는 소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해당한다. 그의 눈에 비친 부친은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며 가족 위에 군림하는 폭군이다. 그런 면에서 같이 차별을 받고 있는 엄마에게 동지애를 느끼며 남자로서 약한 여성을 보살펴야 한다는 의식마저도 싹 텄으리라 본다. 그런데 여기서 기존의 엄마 모습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어머니의 삶은 언제나 성스럽게 비춰져야만 하고, 그녀의 고생과 역경에 대하여 감사하는 식의 감상적인 끝맺음을 해야 하는데 의외의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대학생과 사랑에 빠져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간 것이다. 이런 엄마의 배신으로 인해 어머니 상(像)에 대한 본격적인 붕괴가 일어난다. 서로 도와가며 권력자에게서 버틸 수 있는 최고의 아군이라고 생각한 동지가 가장 비겁한 방법으로 배신한 것이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될 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 애당초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식의 허무주의적 결론이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으리라. 아버지에 대한 증오보다 엄마에게서 받은 굴욕과 배신감이 더 뼈저렸으리라 본다. 원래 일본인은 예전부터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숭고함과 강인함을 마음속의 지주로 삼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부권상실로 인해 비롯되는 사회 문제보다 현재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는 모권신화의 붕괴야말로 중대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한다.
가즈오의 부인 역으로 분한 이시다 아유미(いしだ あゆみ)는 원래 가수로 데뷔하여 많지 않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나오는 영화마다 다양한 개성을 연기해냄으로써 중견배우로서의 위상을 굳혀가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비중이 적지만 요코역의 마쓰자카 게이코(松坂慶子)는 아동극단 출신으로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여배우에 속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 어린 가즈오의 엄마역으로 특별 출연한 단 후미(檀 ふみ)는 실제 단 가즈오의 딸로서 더 유명하다. 이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의 일류 사립대인 게이요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72년부터 배우로 활약하면서 30편에 출연한 배우이다. 지적인 이미지의 소유자로 소설가 및 에세이스트 등 활약이 다양하다.
그밖에 스타일상의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독특한 분위기 창출 방식인데, 원작의 톤에 깔려 있는 어둡고 우울한 느낌은 이 영화에서 어이없을 정도로 밝게 변화된다. 심각한 이야기를 어처구니없이 장난치듯 이야기하는 부부의 모습 등 보통 이 정도로 문제가 있다면 가정이 엉망이 되겠지만, 등장 인물들의 통절함 가운데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빛나고 있다.
가정을 지녔으면서도 여러 여성과의 정사를 나누며 유랑하는 가즈오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영화 후반부에 요오코와 발길 닿는 데로 흘러 흘러가는 여정은 자연스럽게 이 영화의 로드 무비적 색채를 짙게 한다.
화택이 갖는 의미는 한 여름의 이글대는 역동성,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가 싶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결코 새로운 체험을 쌓지 못하는 것이고 반대로 정신의 완전성, 즉 정신의 카리스마가 역동성에서 비롯된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끊임없이 자유를 꿈꾸며 이름 모를 그 무엇을 그리워하며 안식을 찾는 가즈오. 그런 남편으로 인해 말이 없어지고 종교에 매달리는 그녀의 어리석음을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한없는 상처에도 감내하고 이겨내는 자애롭고 현명한 요리코의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정화시키는 듯하다.
가즈오가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 그의 자유로운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게이코와 여행에 동행해준 요코의 곁을 떠난 후 그의 허망함은 무엇인가? 아마도 이러한 것이 우리 인간의 삶 그 자체의 애매모호함이 아닐까. 그 애매모호함이 항구 불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끊임없이 변해 가는 것인지는 아마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무거워서 어쩌나... 무거워서 힘겹네....'를 반복하며 네 아이를 목에 걸고, 양팔에 들고, 등에 둘러맨 채로 멀어져 가는 가즈오의 모습이 아련히 남는다.
일본에서 샹송가수로 많이 알려진 사가 요시코(嵯峨美子)가 부른 주제가는 애처로운 정서의 부드러운 멜로디로 영화의 여운을 더해주어 마지막 크레디트가 올라가도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할 것이다.